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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3687_앙코르와트 - 자야바로만 7세,앙코르 제국의 대왕(이형종 저) (해외배송 가능상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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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서적 3687_앙코르와트 - 자야바로만 7세,앙코르 제국의 대왕(이형종 저)

저자 : 이형종
출판사 : 비움과소통
발행일 : 2014. 5. 1
페이지수/크기 : 352쪽 | 152 * 225 mm
ISBN-10 : 8997188550 | ISBN-13 : 9788997188550

[책소개]

이 책은 자야바르만 7세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형식으로 앙코르 제국의 역사와 유적을 흥미진진하게 소개한 책이라 할 수 있다. 부록에 첨부한 앙코르 왕들의 연대기와 유적 일람표, 앙코르 제국의 영역지도, 시엠립 관광지도와 함께 캄보디아의 유적과 캄보디아인들의 풍속과 삶을 촬영한 사진들이 소설을 읽는 재미와 함께 역사적인 안목으로 앙코르 와트를 살펴보게 할 것이다.

[출판사 서평]
한해 40만 명이 넘는 한국인들이 찾는
위대한 앙코르 와트와 인근 유적의 비밀을
자야바르만 7세의 행적을 따라가며 찾아보자

주캄보디아 대사관 총영사로 근무한
이형종 외교관의 역사ㆍ전기소설
《소설 앙코르 와트》

- 자야바르만 7세, 앙코르 제국의 대왕 -

지상 불국토의 발원이 담긴 성지를 건설한
앙코르 제국의 위대한 대왕, 자야바르만 7세


한해 40만 명이 넘는 한국인들이 앙코르 와트를 관람하기 위해 킬링필드의 나라 캄보디아를 찾는다. 매일 천여 명의 한국인들이 무덥고 힘겨운 여행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가는 신비스러운 앙코르 와트와 수많은 유적들은 어떻게 거기에 있게 되었고, 어떤 삶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일까? 한낮에는 태양의 열기로 숨쉬기조차 힘든 이 땅에 어떻게 이런 거대한 ‘돌의 향연’이 가능했을까? <소설 앙코르 와트>는 앙코르 제국의 가장 위대했던 자야바르만 7세의 족적을 따라가며 그 해답을 찾아본 전기소설이자 역사소설이다.

앙코르 와트! ‘앙코르’의 의미는 도시이고 ‘와트’는 사원을 뜻한다. 따라서 ‘앙코르 와트’란 ‘도시의 사원’인 것이다. 사실 앙코르 와트는 하나의 거대한 사원에 불과하고, 앙코르 제국의 왕도였던 오늘날 캄보디아의 북서부 도시 시엠립 인근에는 그 옛날의 거대한 도성과 수많은 사원들이 천년 세월의 무게를 담고서 정글 속에 살아있다. 또한 캄보디아 지방 곳곳에는 수많은 유적들이 산재해 있고 수십 개의 사원과 건축물들이 발굴되어 개방되었지만, 아직도 밀림 속에 파묻혀 사람들의 발길을 거부하고 있는 신비한 유적들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기원후 802년부터 1430년까지 인도차이나를 호령한 앙코르 제국은 30여 명의 왕이 권좌에 올라 통치하였다. 이 제국에서는 왕위계승 원칙이 확립되지 않아 왕이 교체될 때마다 분열과 피로 물든 전투가 반복되었다. 통치중인 왕을 살해하거나 치열한 전투를 통해 경쟁자를 물리치고 등극한 여러 왕들은 자신의 치세를 들어내기 위해 신들에게 바치는 거대한 사원과 건축물을 남겼다.

오늘날 캄보디아인들은 위대한 앙코르 제국의 족적을 남긴 여러 왕 중에서 “자야바르만 7세”를 단연 최고의 왕으로 손꼽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는 1120년대에 태어나 1181년에 왕으로 등극하고 1219년경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우리나라의 고려 무신 정권시대와 대체로 겹친다. 우리는 오늘날 시엠립을 방문하여 웅대하며 신비로운 앙코르 제국의 유적을 통해 그의 정복왕과 건축왕으로서의 업적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은 자야바르만 7세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형식으로 앙코르 제국의 역사와 유적을 흥미진진하게 소개한 책이라 할 수 있다. 부록에 첨부한 앙코르 왕들의 연대기와 유적 일람표, 앙코르 제국의 영역지도, 시엠립 관광지도와 함께 캄보디아의 유적과 캄보디아인들의 풍속과 삶을 촬영한 사진들이 소설을 읽는 재미와 함께 역사적인 안목으로 앙코르 와트를 살펴보게 할 것이다.

앙코르 와트와 인근 정글의 수많은 유적은
인간의 피와 땀이 스며있는 삶의 역사적 결과물


한때 세간에는 앙코르 와트가 곧 문을 닫을 것이니 하루라도 빨리 여행을 다녀와야 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이는 여행객을 한 명이라도 더 모집하기 위해 여행사들이 퍼뜨린 헛소문이다. 앙코르 와트의 규모와 앙코르 제국이 건설한 수많은 유적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게 된다면 이 말이 얼마나 뻔뻔한 거짓말이고 그들이 이룩한 웅장하고 아름다우며 신성한 수많은 유적에 대한 모독이라는 데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앙코르 와트를 방문하는 여행자들은 짧은 시간 관광을 하기 때문에 안타깝게도 앙코르 와트와 그 인근의 서너 개 대표적 유적만을 둘러보게 된다. 그러나 이 몇 개의 유적만으로도 유적들의 거대한 규모와 거기에 새겨진 셀 수 없이 많은 조각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궁금증을 가지게 된다. 누가 어떻게 이 거대한 유적을 만들 수 있었을까? 이 글은 소설 형식을 빌려 그 궁금증을 풀어주기 위한 작업이었다.

앙코르 제국의 최전성기를 이룬 자야바르만 7세가 왕위에 이르기까지 생각과 행적, 그리고 왕좌에 이른 후 야망을 실현해 가는 과정을 추적했다. 앙코르 역사에 대한 기록의 부실함을 소설적 상상력으로 메꾸어 본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은 역사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소설이다. 그렇지만 이 책을 통해 우리가 오늘날 캄보디아의 지방도시 시엠립을 방문하여 볼 수 있는 앙코르 와트와 인근 정글에 숨어있는 수많은 유적지가 단순히 돌무더기가 아니라 인간의 피와 땀이 스며있는 삶의 결과물이고 기록임을 역설하고 싶었다.

자야바르만 7세의 출신에 대해서는 몇 가지 다른 의견이 있다. 크게는 두 가지로 그가 지방 장군으로 참파를 물리치는 가운데 힘을 얻어 왕위에 올랐다는 설과 그의 부친이 다란인드라바르만 왕이고 야소바르만 왕과 어떻게든 혈족관계에 있던 인물로 보는 견해가 그것이다. 이 글은 후자의 입장에 바탕을 두고 있다. 자야바르만 왕이 불교를 중시한 것은 지방출신으로 기득권 세력들과의 대결에서 유리한 지위를 점하기 위한 방편이었다는 논거는 전자의 주장과 궤를 같이 하는 것으로 상당히 설득력 있게 들린다.

이 글에 나오는 서력의 연대와 미터법은 역사를 다루고 유적의 규모를 소개하기 위해 채용된 것이다. 앙코르 시대에 서력과 미터법이 있을리 만무하다. 하지만 서력 연대는 역사적 시기를 비교해 볼 수 있게 하고, 미터법에 의한 표기는 독자에게 실물의 크기를 상상할 수 있도록 해주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어떤 건축물들이 설계당시 앙코르의 도량척도에 의해 의미있는 숫자 단위로 설계되었을 때 그러한 의미를 전달해 주지 못하는 단점은 있다.

많은 유적지나 지방의 오늘날 이름은 앙코르 제국 당시의 불리던 명칭과 다르다. 예컨대 오늘날 부르는 따 프롬은 옛날에는 라자바하라였고, 지금의 쁘레아 칸은 나가라 자야스리였다. 앙코르 와트가 오늘날의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도 16세기에 이르러서이다. 편의상 오늘날 이름을 주로하고 옛날의 이름이 알려져 있는 경우 이를 소개하였다.

또한 이 글의 에피소드에 등장한 인물들은 가공인물들이다. 하지만 앙코르 역사 속의 유사한 인물을 끌어들여 사용하였다. 역사 속 인물의 경우에도 해당 지위에 이르기 전의 이름과 관직에 이르렀을 때 또는 사후에 추서된 이름이 달랐을 것이다. 앙코르 시대에는 공식성과 존엄성을 나타내기 위해 산스크리트어를 빌려 이름을 붙였다. 그런 경우 말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공식명을 축약하여 사용했다. 예컨대 자야바르만 왕을 자야로, 야소바르만 왕을 야소로 표기한 것이다.

디바까라-반디따는 3명의 왕과 관련된 실존했던 덕망있는 조신이자 궁정의 관리였다. 그는 1080년 자야바르만 6세를 왕위에 추대하였으며, 자야바르만 6세가 죽자 죽은 왕의 형 다란인드라바르만 1세의 즉위식을 치뤘다. 그후 다란인드라바르만 1세를 살해한 수리야바르만 2세를 왕위에 옹립한 것도 디바까라-반디따였다. 반디따는 산스크리트에서 유래한 말로 영어에서 쓰이는 pundit(범학자梵學者)와 의미를 같이한다.

자야바르만 왕에게는 참족의 젊은 장수 출신으로 말리앙에서 일어난 반란을 평정하고 황태자로까지 임명된 비댜난다나가 있었다. 그는 참파 원정 때 자야바르만을 배신하게 된다. 빠드마는 어떤 비문에 자야바르만 2세의 대신이자 처남이며 전투에서 한번도 패한 적이 없는 장수였다는 기록이 있다. 수바드라는 자야바르만 6세 때 성전을 깊이 공부한 대학자로 유명하며, 따디는 시암족이 쁘레아 비히어 사원을 공격해 왔을 때 끝까지 싸우다 패하게 되자 절벽에서 몸을 던진 장수였다.

자야 대왕을 존경한 폴포트…역사는 반복되는가?

이 글에는 역사적 사실을 깬 파격이 하나 있다. 주달관의 앙코르 방문은 자야바르만 7세 사후 70여 년 뒤에 이루어진 일이나 그의 <진랍 풍토기>는 앙코르 시대를 알려주는 가장 값진 역사 기록물로 대접받고 있어 이 글의 재료로 활용했다. 어느 부분이 역사적 사실이고 어느 부분이 소설적 상상력의 산물인지 매번 밝히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역사적 사실을 최대한 살리고자 노력했음을 밝히고자 한다.

‘킬링필드’라는 캄보디아를 학살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폴 포트’가 자야바르만 7세를 본받으려 했다는 해석이 있다. 폴 포트가 앙코르 제국과 같이 오늘날의 캄보디아를 발전시키고자 하는 이상을 품었을 수 있으나, 그의 비이성적 광기는 현대사에서 가장 잔악한 학살의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1178년 참파의 침입은 자야바르만 7세가 왕위를 쟁취하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캄보디아 근대사에 있어 1979년 1월 베트남의 침입으로 폴포트의 학살 정권이 종말을 고하고 베트남의 지원을 받은 인물들이 권력을 장악하여 오늘날 캄보디아의 지도자로 역사를 써가고 있음은 우연일까. ‘역사는 반복된다’라는 케케묵은 금언을 회상해 보게 한다.

[목차]

프롤로그

제1부 좌절의 시대
1. 왕도 야소다라푸라
2. 설날 쫄츠남
3. 어경절의 거사
4. 꿀렌 고원
5. 쁘레아 비히어 사원
6. 똔레삽 호수
7. 프놈 펜
8. 메콩 강
9. 변방 몬돌끼리
10. 자야디티푸라
11. 귀환

제2부. 재기의 시대
12. 피신
13. 참파 국
14. 적과의 연맹
15. 참파의 침입
16. 성전 앙코르 와트
17. 앙코르 와트의 서사시
18. 사원 세력
19. 즉위식

제3부. 번영의 시대
20. 하리하랄라야 행차
21. 말리앙의 반역자
22. 융성하는 제국
23. 난다나의 사랑
24. 효심의 사원
25. 참파 정벌
26. 상실과 회복
27. 성도 앙코르 톰
28. 반디따의 소망
29. 중원의 사신
30. 바켕의 일몰

부록
ㆍ앙코르 왕들의 연대기와 유적 일람표
ㆍ앙코르 제국의 영역
ㆍ시엠립 관광지도

[책속으로]

붓다는 만인의 평등을 주장했다
자야는 불교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자야는 막연하게 불교는 중생들을 불쌍히 여기고 이들이 갖는 삶의 고해에서 해방시켜 주고자 한다고 알고 있었다. 그리고 붓다는 사람은 누구나 수행을 통하여 해탈할 수 있으며 만인의 평등을 주장했다고 들었다.
자야의 부친이 불교도였다고는 하나 앙코르의 백성들이 믿고 있는 보편적 종교는 힌두교였다. 힌두교는 브라흐마, 비슈누 그리고 시바 신을 믿었는데, 이들이 하나로 통합되어 삼신일체를 이루었다. 힌두교는 인도에서 시작된 것으로 앙코르 제국 훨씬 이전부터 이 땅의 족장과 통치자들은 힌두교를 받아 들여 자신의 권위를 높이는데 이용하였다. (61P)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 갈 새 종교는 불교
수바드라 선사가 잠시 말을 끊었다. 그리고 심각한 표정으로 힘주어 다음 말을 이어나갔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 갈 새로운 종교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불교입니다. 불교도 힌두교 못지않게 역사가 깊고 뜻이 거룩합니다. 다만 우리가 인도와 긴밀히 통교하다 보니 그들에게서 흥한 종교를 우리도 공유하게 되어 힌두교가 중심이 되었습니다. 허나 힌두교의 원시성은 제국을 이끌어 가는 이념으로는 부족합니다. 이제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새 정신이 되어야 합니다. 그동안 앙코르의 제왕은 시바 신이나 비슈누 신과의 특별한 관계 속에서 신과 같은 지위를 가졌습니다. 그래서 왕은 멀리 떨어진 존재였고 궁궐 안에 숨어있는 무시무시하고 신비스러운 존재였습니다. 이제는 제왕이 신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같은 인간인 백성을 이끌어 가야 합니다. 제왕은 많은 중생들의 고해를 이해하고 그들을 구원해야 합니다. 일찍이 수리야바르만 왕도 국교로 시바신을 섬겼으나 불교를 허용했습니다. 그래서 불교도를 지원하여 브라만들을 견제하려 하였습니다. 부왕이신 다란인드라바르만 왕은 불교를 처음으로 왕실에 공식 도입했습니다.”(80P)

불교제국에서 자비로써 신민들을 보살펴야겠다
자야도 차츰 힌두교와 불교의 차이에 눈뜨게 되었고, 불교에 귀의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생각했다. 힌두의 왕은 백성이라는 존재관념이 없고 오직 신에게 제사와 사원에 봉헌함으로써 그의 지위를 보존하려 하였다. 나아가 힌두교에 기반한 세계에서 왕은 신과의 특별한 관계 속에서 신에 상응하는 지위를 가졌다. 왕은 신에 준하는 존재가 아니라 우월한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들을 이끄는 존재로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생각이 자야의 믿음이 되어갔다.
그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하여 자신의 제국을 건설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불교제국에서 자비로써 신민들을 보살펴야겠다고 생각했다. (81P)

자야 대왕이 꿈꾼 사상과 지혜를 불교사원에 담다
반디따는 자야 왕과 자신이 꿈꾸고 지녀왔던 사상과 지혜를 빠짐없이 사원에 담고자 했다. 그리고 백성이 버겁지 않도록 손이 많이 가지 않는 사원을 건설하고자 했다. 반디따는 사원을 수단으로 해서 왕에게 고귀한 뜻을 전하고 싶었다. 초심으로 돌아가 불교가 가르치는 백성을 구하는 나라를 만들라고! 아니 자야 왕에게 뿐만 아니라 만세를 이어가는 후대의 왕들에게 경고하고 싶었다. 그는 어느 순간 자야 왕보다 더한 불자가 되어 있었다.
반디따는 외벽이 없는 사원을 만들기로 했다. 외벽이 없으면 모든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쉽게 사원을 볼 수 있다. 누구나가 쉽게 볼 수 있는 사원을 건설하고 왕의 얼굴을 자애롭고 넉넉하게 부처의 모습으로 표현하여 후세의 왕들이 이러한 모습을 잃지 않고 백성을 사랑하라고 말하고 싶었다. (315P)

[저자소개]

저자 : 이형종

저자 이형종은
1990년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하고 외교부에 입부.
외교통상부에서 여권과장, 경제기구과장, 주OECD 대표부 참사관 등으로 재직.
2012년 2월부터 2014년 2월까지 주캄보디아 대사관에서 총영사로 근무.
現 외교부 소속 외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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