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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3337_전인 미답지를 일러주마 ( 이뭣고 선지식 총서 03 ) - 정일 선사 선어록 (정일선사법어집편찬 저) 비움과소통 (해외배송 가능상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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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서적 3337_전인 미답지를 일러주마 ( 이뭣고 선지식 총서 03 )

저자 : 법어, 정일선사법어집편찬위(엮음)
출판사 : 비움과소통
발행일 : 2014. 01. 01
페이지수/크기 : 219쪽 | 129 * 189 mm
ISBN-10 : 899718847X | ISBN-13 : 9788997188475

[책소개]
『전인 미답지를 일러주마』는 간화선 수행법을 일목요연하게 밝힌 수행지침서다. 철저한 염불과 독경으로 불법에 대한 신심과 기본적인 안목을 갖춘 후 하는 참선수행은 흔들림 없는 발심을 갖추게 되어 화두 참구를 통해 힘을 얻는데 큰 도움이 된다. 조계종의 대표적인 선사로서 선학원 이사장을 역임한 故 정일 선사(보광사 조실)는 평생 간화선을 위주로 한 참선수행에 매진했고, 제자들과 신도들에게도 수행법을 자상하게 지도했다.

[출판사 서평]
조계종의 대표적인 선사로서 선학원 이사장을 역임한 故 정일 선사(보광사 조실)는 평생 간화선을 위주로 한 참선수행에 매진했고, 제자들과 신도들에게도 수행법을 자상하게 지도했다. 이 책은 간화선 수행법을 일목요연하게 밝힌 수행지침서다.
서울 보광사를 처음 찾은 불자는 우선 광명진언을 하루 1,000번씩 21일간 외우고 천도재를 지낸다. 그리고 [지장경] 300독, [금강경] 100독,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 50독, [선가귀감] 50독, [원각경] 300독, [법화경] 30독, 다시 한번 [선가귀감]을 50독 하는 것으로 교육과정이 끝난다. 이때 정일 선사는 교육을 이수한 불자를 불러 공부를 자상하게 점검하는 한편 ‘이 뭣꼬’ 화두를 준다. 이처럼 철저한 염불과 독경으로 불법에 대한 신심과 기본적인 안목을 갖춘 후 하는 참선수행은 흔들림 없는 발심을 갖추게 되어 화두 참구를 통해 득력(得力)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남산정일 선사 행장(南山正日禪師行狀)

스님께서는 1932년 임신(壬申)년 음력 2월 27일 서울 은평구 불광동 365번지에서 출생하셨다. 부친은 제주 고(高)씨, 정록이셨고, 모친은 하동 정(鄭)씨, 간난이셨는데, 스님께서는 두 분 슬하에 2남 1녀 중 차남으로 출생하셨다. 스님의 속명은 이득(二得)이시다.
여덟 살 되시던 해, 어느 날 도살장에서 죽을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소의 눈망울을 보고 죽음으로부터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을 하시게 되었다. 그 후 성장하여 중ㆍ고등학교를 졸업하시고 한동안 형편이 어렵던 집안일을 돌보며 지내셨다. 이때에도 어렸을 때 도살장에서 본 풍경을 잊지 않고 기억하시며 죽음을 초월할 방법을 계속 찾으셨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고서점에서 한 권의 불서(佛書)를 발견하시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스님께서 이후 수십 년 동안 후학들에게 수행의 거울삼아 읽을 것을 누차 강조하셨던 선서(禪書) 『선가귀감』이었다. 스님께서는 당시에 그 뜻을 잘 모르면서도 『선가귀감』을 수십 번이나 되풀이해 읽으셨다. 그런 인연으로 불교 관련 책들을 찾아 읽으시며 생사초월의 뜻을 지속적으로 품고 계셨는데, 마침 조계사 신도 회장이었던 어느 친척 분의 권유가 있어 조계사로 출가하시게 되었다.
당시 조계사의 원주 소임을 보시던 범행(梵行) 스님은 자신의 은사 스님이 되시며, 당시 총무원장이셨던 태전(太田) 금오(金烏) 선사에게 스님을 안내해주셨다. 이에 스님께서는 1958년 금오 선사를 계사로 하여 사미계를 수계하셨다. 법명은 정일(正日) 이시고 당호는 남산(南山)이시다. 스님께서는 은사 스님이 주지로 계시던 전남 구례 화엄사로 거처를 옮기셨다. 그곳에서 1년가량 머무시다가 시중에서 쓸 양곡을 마련하기 위해 화엄에서 진주까지 걸어서 탁발 행각을 떠나셨는데, 이 기간에도 화두 일념하시다가 동네 골목길을 잘못 들어가신 적이 무수히 많았다. 스님께서는 3개월 동안의 탁발을 마치고 화엄사로 돌아와 3ㆍ7일 기도를 성만하셨다.
이후 스님께서는 망월사 주지이셨던 춘성 스님을 찾아가셨는데, 도량의 형세가 마음에 들어 천일(千日)간의 원력을 세우고 기도를 시작하셨다. 당시 법당은 인법당 구조로 1층 건물이었고, 선방이 달리 없어서 법당에서 참선을 함께 하고 있었다. 그런 형편 때문에 수좌스님들은 없고 재가 처사님과 보살님들만이 정진 중이었다. 스님께서는 참선과 기도를 병행하기로 하시고 수행 정진하셨다.
기도를 시작한 후 오백 일까지는 졸음을 쫓기 위해 매일 새벽 2시에 일어나 냉수욕(冷水浴)을 하셨다. 그렇게 오백 일이 지나자 냉기가 뼛속 깊이 사무쳐 들어와 소화가 안 되는 등 냉병이 생겼다. 그래서 여름에도 따뜻한 화로에 기와를 구워서 배에 한참 동안 대고 있어야 소화가 될 정도였다. 그 후 지나친 고행을 하거나 몸을 혹사시키는 것이 오히려 수행에 장애가 된다는 것을 느끼시고 나머지 오백 일 동안은 냉수욕을 삼가셨다.
그 무렵 속가의 부친께서 중풍으로 와병 중이셨는데, 당시 매우 치열한 각오를 가지고 기도 정진 중이셨던 스님께서는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출문(出門)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일념으로 기도에 매진하셨다.
하지만 이때 꿈에 부모님의 좋지 않은 모습이 보이는 등 여러 가지 마장이 일어났다. 마장이 매우 드세어 스님께서는 괴로움을 크게 느끼셨고, 이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화두를 드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밖에는 나지 않아서 염불 기도시간이 끝나면 곧바로 참선을 시작하여 화두에 매진하셨다.
기도 중에 일어나는 끊임없는 마장에도 불구하고 스님께서는 기도와 염불을 매우 극진하게 잘하셨는데, 이 모습을 보고 당시 원주 스님이 좋지 못한 마음을 품었다. 그 스님은 춘성 스님께 가서, 법당에서 참선을 하는데 염불소리가 시끄럽다는 등 여러 가지 모함을 하여 스님을 절 밖으로 내쫓으려고 하였다. 이에 스님께서는 회향을 하지 않고는 제 발로 걸어 나가지는 않겠다고 춘성 스님께 간절히 고하셨다. 춘성 스님께서는 그 마음을 아시고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시며 스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기도를 계속할 수 있게 도와주셨다.
다행히 천일기도는 이어갈 수 있게 되었지만 마장 경계가 다 사라진 것은 아니어서 어려움은 계속 되었다. 스님께서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목탁 채에 솜을 두르고 목탁을 치셔야만 했다. 이때 염불 기도시간에는 오로지 염불만 하시고, 염불이 끝난 후에는 바로 참선을 하여 화두를 드셨는데, 화두를 들지 않으면 여러 가지 마장 때문에 견디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염불과 화두를 동시에 병행하지는 않으셨다. 두 가지를 동시에 수행하면 체력적인 소진이 너무 컸기 때문에 스님께서 취하셨던 나름대로의 수행 방법이었다.
그렇게 천일기도가 마무리되어갈 무렵, 춘성 스님께서는 스님의 원만한 회향을 돕기 위해 회향 직전에 몸소 21일간 용맹정진을 하셨다. 스님께서는 그 곁에서 7일간 철야기도를 하시면서 마침내 그 어려운 천일기도를 회향하셨다.
천일기도를 회향하신 후 무주구천동 토굴로 은사이신 금오 선사를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고, 그 후 재차 은사 스님을 찾아 청계산 청계사로 가셨다. 그곳에서 금오 선사께서는 스님에게 원주소임을 맡기셨다.
스님께서는 소임을 보시던 중, 동산(東山) 스님이 조실로 계셨던 부산 범어사에서 정진을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여 청계사에서 겨울 동안 쓸 땔감 3개월 치 분량을 마련해두시고는 동안거 결제 때에 맞추어 어느 날 새벽 홀로 길을 떠나셨다.
범어사에서 스님께서는 본격적인 참선 수행을 시작하셨다. 시심마(是甚?, 이뭐꼬) 화두를 참구하셨는데, 동안거 결제 기간 중 어느 날 화두와 별개로 ‘새벽종송’에 나오는 장엄염불 중 ‘육문상방자금광(六門常放紫金光)’이라는 대목의 뜻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또한 그날 낮에 중단 불공을 올리는데 『화엄경』 ‘약찬게’에 나오는 ‘육육육사급여삼(六六六四及與三)’의 뜻도 확연히 이해가 갔다. 이때부터 화두가 풀려서 의심도 없어지고 들리지 않기 시작했다. 스님께서는 경계가 바뀐 것으로 이해하시고 그것을 올바른 견처(見處)인지를 점검받기 위해 해제를 하면 당시 선지식으로 이름 높았던 전강(田岡) 선사를 찾아뵙겠다고 결심하셨다. 마침내 해제가 되어 인천 주안의 용화사로 전강 선사를 찾아뵈었다. 선사께서는 스님이 묻지도 않았는데 얼굴을 한 번 보시더니 상황을 다 아신 듯 스님에게 “경계를 일러보게”라고 말씀하셨다.
스님께서 경계를 이르시니 일원상(一圓相)을 그리시고는 ‘입야타 불야타(入也打不也打)’ 공안을 물으셨다. 이에 스님께서 걸망을 지고 원 안으로 들어가시는 시늉을 하자 전강 선사께서는 주장자로 어깨를 한 번 치셨다. 이에 스님께서 “무엇을 치셨습니까?”라고 하시니 전강 선사께서 재차 주장자를 치셨다. 이에 스님께서는 “수고하셨습니다”라고 답하니 전강 선사께서 다시 치셨다.
이렇게 여러 번 오고간 후 전강 선사께서는 방법을 바꾸시어 “의리(義理)로 일러보소”라고 하셨다. 이에 스님께서는 ‘의리’라는 단어의 뜻을 몰라 꽉 막혀 잠자코 있었더니 다시 공부를 지으라고 하셨다. 전강 선사의 질문으로 인하여 그동안 들리지 않았던 화두가 다시 들리기 시작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바른 선지식의 점검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사무치게 깨달으셨다.
이후 스님께서는 전강 선사 곁을 떠나지 않기로 결심을 하셨는데, 마침 전강 선사께서 범어사 조실로 부임하시게 되었다. 이에 스님께서도 자연히 범어사에 계속 머무시게 되었다. 그리하여 1963년 동산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한 것을 포함하여 범어사에서 3년, 인천 용화사에서 3년, 수원 용주사에서 3년 등 전강 선사 문하에서만 약 10년간을 참선 수행 정진하셨다. 그러다가 스님께서는 당시 도광(度光) 스님이 주지로 계셨던 화엄사 내 구층암으로 수행처를 옮겨 정진하셨다. 또한 해인사 선원장을 거쳐 통도사 극락암 등 제방선원에서 안거를 성만하셨다.
공부 도중 홀연히 마음의 눈이 열려 현실 경계 그대로가 실상이고 열반인 도리에 계합(契合)하시고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으셨다.

극빈자는 이슬 맺힌 갈대숲이 좋다
홀연 한 가닥 시광이 온 대지를 투과하니
만년 전사 부처님 열반이 드러났네

안개비가 내리는구나, 안개비가 내리는구나
마지막 이별을 고하는 슬픔과 같이
전인 미답지가 궁금하느냐?
잔물결 이는 개울로 가서 세수나 하거라

그리하여 전강 선사를 친견하고자 하셨으나 때는 이미 늦어 전강 선사와의 인연이 다했는지 선사께서는 입적하신 뒤였다.
그 후 스님께서는 속가 어머님을 모시고 안성의 천석산 토굴에서 정진하셨고, 1970년 전라남도 해남 강진의 백련사에서 주지 소임을 약 4년간 보시면서도 속가 어머님을 모시고 정진을 계속하셨다. 모친이 별세하신 후 문득 ‘밝은 진리를 전하기 위해 홀로 길을 떠나라’ 라는 부처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또한 불은(佛恩)에 보답하고 싶은 마음도 간절했다. 이에 따라 스님께서는 포교의 원력을 강하게 세우시게 되었다. 때마침 도심 포교를 해보라는 주위의 권유 등이 있어 자연스럽게 서울에서 포교하는 인연이 닿게 되었다.
스님께서는 서울로 거처를 옮기신 후 속가의 인연이 있던 도봉구를 중심으로 수행ㆍ포교 터를 물색하셨다. 백여 군데의 터를 둘러보셨으나 마땅한 곳이 없던 중 우연히 지나가던 어느 거사의 말을 듣고 마침내 현재의 보광사 터를 발견하시게 되었다. 스님의 원력을 실천하기 위한 수행과 포교의 도량 터는 이렇게 하여 마련되었다.
1979년, 스님께서는 북한산 자락의 그 터에 도량을 건립하기로 원력을 세우시며 사찰명을 보광사(普光寺)로 명명하시는 한편, 1987년 관음전 불사를 필두로 하여 요사채를 세우셨고, 1990년 보광선원, 1993년 대웅전을 조성하셨으며, 2003년에는 회관 불사를 이루어내셨다.
이후 스님께서는 보광사를 중심으로 도심 포교에 전념하시는 한편, 보광선원을 개설하여 조실로 주석하셨다. 또한 불교의 정맥을 이어오는 데 큰 역할을 한 대한불교 조계종의 모체(母體) 선학원 원장(1983~1985)을 역임하셨고, 1992년부터 2004년까지 선학원 이사장으로 재임하시면서 부처님 정법(正法)을 수호하셨다. 이사장으로 재임하시는 동안 대한불교 조계종 종단과, 종단의 모체(母體)인 선학원과의 갈등이 격화되어 분파될 뻔 하였으나, 사욕을 떠난 스님의 혼신을 다한 덕화와 화합의 노력 덕분에 문제가 원만하게 해결되었다.
지리산 정각사 죽림선원 조실(1991~2004)과 속리산 법주사 주지(1992~1994)를 역임하셨으며, 지방에도 포교의 거점을 마련하시고자 충남 금산 서대산에 선문사를 건립하셨다. 부산 김해에도 보광사를 건립하셨는데, 여기에서는 보광선원과 보광유치원이 함께 운영되고 있다. 또한 1999년, 충북 청주에 충북불교문화회관을 건립하셨다. 그 직후에 중부권 지역의 불교 발전을 위하여 회관 일부를 청주 불교 방송국에 영구적으로 무상 임대하심으로써 충북 불교 포교에 핵심적인 요람으로 성장하도록 크게 뒷받침하셨다.
스님께서는 부처님의 정법과 참선법을 수호하시며 수좌들을 바르게 이끌기 위해 노력하셨다. 부처님과 조사 스님들의 혜명(慧命)을 이어 바른 선(禪)을 펴기 위해 애쓰셨으며, 스스로 수행과 일상 삶에서 모범을 보이시며 평상심의 법을 대중에게 펴 보이셨다.
스님께서는 또한 대중 교화의 방편으로 소승에서 대승, 대승에서 최상승선으로 이끄는 차제적(次梯的)인 교화법을 택하셨다. 그리하여 스님께서는 광명진언과 『지장경』에서부터 시작하여 『관세음보살보문품경』『금강경』『선가귀감』『원각경』『법화경』으로 심화된 후 『선가귀감』으로 마무리하게 되어 있는 수행법을 널리 퍼셨다.
스님께서는 대중 속에서 더불어 함께 하시면서 염불, 간경, 참선 등 원효대사께서 보이셨던 통불교적(通佛敎的)인 수행 방법을 통하여 인간뿐 아니라 법계의 모든 중생들을 제도하는 보살도를 행함으로써 일체중생에게 이익이 되는 보살의 삶을 살도록 대중들을 이끄셨다. 대승불교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육바라밀법을 수행의 근간으로 삼도록 하셨으며, 설법을 하실 때마다 이를 특히 강조하는 것을 잊지 않으셨다.
대승불교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화엄경』 ‘보현행원품’에 나오는 보현보살님의 서원에 따라 일체중생의 근기에 수순해줄 것을 강조하셨던 스님께서는, 무한히 따뜻한 자비로움을 일체중생들을 포용하시며 진리의 밝은 세계로 인도하셨다. 최상승선을 수행하는 수좌들과 학인들에게는 서릿발 같은 엄격함으로 질책하심으로써 후학들을 올바르게 지도하셨다.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고루 갖추시고 바르고 곧으며 따뜻한 성품을 지니신 남산 정일 선사께서는 오랜 세월 동안 북한산 자락의 청정도량 보광사에서 일체중생들과 더불어 동고동락(同苦同樂) 하시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시자를 불러 이르셨다.

“이제 갈 곳 없는 곳을 가야만 한다.”(不能去的也要去)
“어디로 가신단 말씀입니까?”(?到底要去何方)
“창문을 열고 자세히 살펴보거라.”(打開?戶着一着)

이렇게 말씀하시고 편안히 열반에 드셨다.

[목차]
제 1장. 선(禪)
1. 선의 개념과 종류
2. 일구와 이구
3. 묵조선과 간화선
4. 조사선과 여래선
5. 인도선과 중국선
제 2장. 화두(話頭)
제 3장. 정법과 외도
제 4장. 외도와 신통
제 5장. 업과 인과
제 6장. 참선 기초 수행법
광명진언
지장경
선가귀감
제 7장. 천도재
제 8장. 육바라밀
제 9장. 현대 과학
제 10장. 영가장애와 신기(神氣)
제 11장. 선어록(禪語錄)
법어(法語)
서장(書狀)
돈오돈수와 돈오점수(돈오보림)
귀신이 들여다보는 공부를 하느냐?
청계천 물과 증류수
도사(道士)와 도사(導師)
보현보살님의 서원
산신기도와 칠성기도
수행과 포교
수행과 교육
전통예법과 수행
명상의 뿌리를 캐내는 법(法)
성인(聖人)
풍수지리
우주의 나이
제 12장. 남산 정일 선사 행장(南山正日禪師行狀)
발문

[책속으로]
?… 최상승선(最上乘禪)은 일체 관념이 붙지 않는 절대적인 그 자리를 이르는 것이기 때문에 격외선(格外禪) 또는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고 합니다. 또 화두선ㆍ공안선ㆍ묵조선ㆍ일구선ㆍ조사선이라고도 합니다.
최상승선, 즉 화두선(話頭禪)은 일체의 헐떡이는 생각을 용납하지 않으며, 화두 자체가 본연(本然) 그대로이기 때문에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고 합니다. 화두를 설명하고자 하면 이미 그르쳐버리는 것이지만, 억지로 비유하여 표현하고자 하면 부처라고 하고 선(禪)이라고 합니다. 그 선(禪)의 자리를 몰라 참구한다고 해서 참선(參禪)이라고 합니다.
요즘 최상승선인 화두도 방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화두는 일체의 방편을 초월했다는 뜻이므로 방편이라 함은 전혀 맞지 않는 것입니다. 화두는 돈오돈수문(頓悟頓修門)입니다. 화두만 바로 잡히면 은산철벽(銀山鐵壁)이 되어 전후(前後) 생각이 딱 끊어집니다. 당장 무아ㆍ무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 즉시 아상ㆍ인상ㆍ중생상ㆍ수자상이 철두철미하게 끊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생사(生死)가 없는 것입니다. 또 그것이 추번뇌(?煩惱)ㆍ세번뇌(細煩惱)가 어른대지 않는 순수한 경계입니다. (10P)

?… 돈오돈수와 돈오점수(돈오보림)
부처님은 마음이 횡으로 종으로 온 우주에 꽉 차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어디서 죽어가며 어디서 오겠습니까? 오가는 거래(去來)가 끊어지게 됩니다. 이런 이치를 먼저 요달해서 깨닫는 것을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을 친견한다고 합니다. 그것이 견성입니다. 그 다음에는 원만보신 노사나불을 성취해야 합니다. 그것이 보림(保任)입니다. 보림을 다 해 마치면 능력을 다 갖추는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만이 이변(理辯)과 사변(事辨)으로 돈오돈수(頓悟頓修)한 분이고 역대 조사는 돈오보림을 하셨습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쉬운 말, 방편적인 말로 표현하여 돈오점수(頓悟漸修)라고 합니다.
역대 조사는 부처님과 같이 그렇게 천백억 화신(化身)을 나툴 수가 없습니다. 삽삼조사까지는 18변신(變身)을 하고 엄청난 신통력을 보이셨으나 부처님과 같은 엄청난 위력은 보이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역대 조사가 부처님보다 모자라는 점입니다. 그것을 보충하는 단계를 선가(禪家)에서는 보림이라고 합니다. 보림은 격외의 말, 조사 문중의 표현입니다. 그것을 보조 스님은 교가(敎家)의 말, 즉 보다 이해하기 쉬운 방편의 말로 표현하여 점수(漸修)라고 하셨습니다.
보조 스님의 점수는 증오점수(證悟漸修)와 해오점수(解悟漸修), 두 가지로 나뉩니다. 증오점수라는 것은 증오보림이라는 뜻입니다. 견성한 후의 보림이라는 말을 할 때는 이것은 격(格)이 매우 다릅니다. ‘닦는다는 생각이 없는 닦음’이기 때문입니다.
해오점수는 이치로는 깨달았는데 증득을 못하였으므로 점차로 수행을 하여 증득해야 하는 것을 일컫는 말입니다. (173P)

[저자소개]
저자 법어는 정일선사(正日禪師) . 정일 큰스님은 1932년 서울 불광동에서 태어나셨다. 1957년 조계사에서 금오 스님을 은사로 득도하시고, 1963년 범어사에서 동산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하셨다. 이후 범어사, 통도사, 해인사, 망월사, 용화사 등 제방 선원에서 정진하셨다. 서울 보광사 보광선원과 정각사 죽림선원 조실, 법주사 주지 등을 역임하셨고, 한국 불교의 선맥(禪脈)을 이어온 학원의 이사장도 역임하시면서, 부처님의 정법을 수호하셨다. 큰스님께서는 2004년 9월 7일 새벽 5시 55분께 충북 속리산 법주사 궁현당에서 세납 72세, 법랍 47세를 일기로 원적(圓寂)에 드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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