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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2372..성철스님행장 (해외배송 가능상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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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서적 2372..성철스님행장 

저자 : 원택스님
출판사 : 글씨미디어
발행일 : 2012. 03. 11
페이지수/크기 : 220쪽 |A5ㅣISBN-10 : 8995406577 | ISBN-13 : 9788995406571

[책소개]
만고의 진리를 향해 홀로 걸으셨던 ‘성철 스님’의 법어와 행적!

2012년 탄생 백주년을 맞이하신 ‘성철 스님’의 가르침과 은혜를 고스란히 담은 『성철스님 행장』. 성철 스님은 스물다섯의 나이에 가야산 해인사 동사 스님에게로 출가하여 평생 철저한 수행으로 다스렸으며, 중도의 깨달음을 일러주기 위해 여러 학문을 자유자재로 넘나드셨다. 이 책은 백여 년에 걸친 현대 불교사와 이에 맞물린 성철스님의 일생을 말씀과 사진을 통해 되새겨 살펴본다. 지리산에서 가야산으로 나아가신 발걸음, 견성을 이루어 깨달음에 이르렀던 정진, 해방과 더불어 불교 중흥의 길을 마련하였던 실천과 가르침, 중생들에게 연기법칙을 전하였던 청량한 법음 등에 대한 사진과 기록들로 채워져 있다. 격동의 현대사에서 중심이 되어 한국 불교의 가능성을 열어준 성철 스님의 가르침과 은혜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출판서서평]
성철 스님이 입적하던 1993년까지 머무르셨던 가야산 해인사 백련암. 큰스님 떠나신 절집을 지키며 스님의 산중수행을 올곧게 잇고 있는 상좌 원택 스님. 큰스님 탄신 100주년을 맞아 차근차근 진행해온 기념사업 준비의 첫 결실로 내놓는 <성철 스님이 들려준 이야기>와 <성철 스님 행장> 세 권은, 스승 성철과 상좌승 원택 사이에 두런두런 주고받던 일상적 대화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 가야산 깊은 산속 산중 수행승들의 면모를 잘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는 값진 글들로 빼곡하다.
“성철 스님 탄신 100주년을 맞이하여 스님께서 남겨두신 ‘사진’들을 잘 정리하여 귀중한 자료로 세상에 남겨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평소 무념무상으로 사신 듯한 스님께서 어쩌면 어떤 의도를 갖고 세상에 흔적을 남기신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당신의 최소한의 자취를 모아두신 듯하여 그나마 다행으로 생각했습니다.” (원택 스님의 머리말 중에서)
생전에 백련암에 ‘장경각’이라는 서고 건물을 별도로 지어 서책들을 직접 관리할 정도로 장서 관리에 빈틈이 없으셨던 성철 스님답게, 남기고 가신 사진들도 잘 갈무리가 되어 있어 이번 책자에 수록할 사진들을 고르고 이를 일러주는 설명들을 덧붙이기가 손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택 스님은 전국 곳곳에서 활동 중인 성철 스님 제자들을 만날 때마다 사진에 얽힌 사연들을 캐묻고 따지고 확인하여, 큰스님과 얽힌 이야기들을 보다 생생하고 애틋하게 전하는 데 최선을 다하였다.

<성철 스님 행장>은 1912년 성철 스님 출생 때부터 1993년 입적 때까지의 행적을 쫓아 기록한 책이다. “불교보다 더 나은 진리가 있다면 또 찾아나서야제!” 젊은 시절 진리를 찾아나선 성철 스님은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당신 보시기에 불교가 가장 빼어난 진리라는 말씀과 더불어 말이다. 그렇게 진리를 찾아 구도의 길을 갔던 뜨거운 수행의 행적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일세시대와 해방, 6ㆍ25, 민주화 등의 파란만장한 시기를 거치게 된다. 그 사이에 불교계에서도 왜색불교 털어내기, 불교정화운동, 10ㆍ27 법난, 돈오돈수 논쟁, 실천불교의 등장 등 크고 작은 변화들이 많았다. 그 격동의 과정을 통틀어 산중 수행승의 자리를 굳게 지키며 우리 불교의 든든한 중심이 되어주셨던 성철 큰스님의 생애와 함께 한국불교 백여 년의 역사를 개괄할 수 있다. 특히 종정 취임 후 입적하신 큰스님들을 추모하며 써서 보내셨던 조사와 큰스님들의 짧은 행장을 함께 수록하여 기록으로서의 가치를 드높였다.

[목차]
불교보다 더 나은 진리가 있다면 또 찾아나서야제!

지리산에서 가야산으로
영원한 삶에 대한 탐구가 시작되다
화두참선을 시작하다
1세|9세|15세|17세|20세|21세|24세

출가와 깨달음
해인사에서 출가를 하다
견성하여 깨달음을 얻다
부처님 법의 그릇된 모습들을 보다
장좌불와로 수행의 전설을 만들다
25세|26세|27세|28세|29세|30세|31세|32세|33세|34세|35세

봉암사 결사로 불교 중흥의 길을 시작하다
3천 배 기도가 시작되다
동구불출하며 사자후를 준비하다
수도자에게 주는 글 성팔이 노트
가르침에서 실천까지
36세|38세|39세|40세|41세|43세|44세|46세|48세|51세|52세|53세|54세|55세

해인사에서 펼쳐지는 중도법문
백일법문을 시작하다
중도법문으로 불교의 진리를 밝히다
중생을 위한 연기법칙을 설명하다
마음의 문을 뜨라, 사바세계가 극락이다
선가의 가풍, 돈오돈수가 설파되다
한국불교에 거센 부침의 바람이 불다
56세|57세|58세|59세|60세|61세|62세|63세|64세|65세|66세|67세|68세|69세

종정에서 열반까지
가야산 호랑이, 조계종 종정이 되다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다
내 말에 속지 마라
70세|71세|72세|73세|74세|75세|76세|77세|78세|79세|80세|81세|82세

[책속으로]
25세 1936년, 丙子, 불기 2963, 단기 4269, 中華民國25, 昭和11

해인사로 거처를 옮겨 퇴설당에서 참선 정진을 하였다. 퇴설당은 1924년에 선원으로 확장되었다. 속인이 선원에서 참선 정진을 한다며 반대 여론이 있었으나 주지 이고경李古鏡, 1882~1943의 호의로 정진을 계속하였다. 1935년에 해인사 강원과 다솔사 강원이 합병되어 다솔사 강사였던 김법린1899~1964이 해인사에서도 강의를 하였다. 이때 김법린이 스님을 만나 교학 연구를 권하였다.
3월 3일 범어사 조실 하동산河東山, 1890~1965 스님을 은사로 해인사에서 사미계를 수계하고 득도하였다. 도첩과 해인사 승적첩에는 은사가 ‘하용봉河龍峰’으로 표시되어 있다.
- p41

30세 1941년, 辛巳, 불기 2968, 단기 4274, 中華民國30, 昭和16

깨달음을 얻어 오도송을 읊고 나서 깨달음의 점검을 위해 제방에서 정진한다.
이 해는 아버지 이상언의 회갑이었다. 장남이 없이 절을 받을 수 없다 하여 절도 받지 않고 가족사진 촬영도 하지 않았다. 다만 부부의 사진만 남아 있다. - p 50

36세 1947년, 丁亥, 불기 2974, 단기 4280, 中華民國36, 昭和22

가야총림과 관련한 사항을 청담 스님에게 일임하고 도우 스님과 통도사 내원암으로 옮겼다. 청담 스님은 하안거에 가야총림에 합류하였다. 김병룡 거사에게 불서를 기증받기로 약속하고 해제하면 봉암사로 옮길 예정을 세웠다.
가을에 봉암사결사가 시작되었다. 김병룡 거사에게 불서를 기증받고 봉암사 극락전에 모셨다. 이때 김병룡 거사에게 기증받은 불서를 정리한 『수다라총목록』에 따르면 총 59부 1,773권이며 스님이 직접 “정해년 중추에 희양曦陽 명찰 봉암선굴鳳巖禪窟에 모셨다”고 적고 있다. - p 77

40세 1951년, 辛卯, 불기 2978, 단기 4284, 中華民國40, 昭和26

2월 28일 월내 묘관음사에 1946년 입적하신 운봉 성수 스님의 진영을 모시면서 진영찬을 지었다.
경남 통영의 안정사 은봉암에서 하안거를 지냈다. 모이는 사람이 늘자 안정사 주지에게 양해를 구하고 안정사와 은봉암 사이에 초가삼간의 토굴을 지어 천제굴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천제굴을 짓는 데에 당시 성주사 주지였던 문일조文一照 스님의 역할이 컸다고 전한다. 천제굴 시봉은 주로 법전 스님이 하였다. 천제굴에서 비로소 신도들에게 3천 배와 아비라기도를 하게 하였다. - p 83

44세 1955년, 乙未, 불기 2982, 단기 4288, 中華民國44, 昭和30

파계사 한송 스님의 초청으로 파계사 성전암으로 옮기려고 하였으나 건물 보수를 위해 법전 스님이 먼저 수리를 하고 스님은 임시로 경남 남해의 용문사 백련암에 머물렀다.
9월 비구측이 19개 사찰의 관리권을 접수하면서 해인사 주지로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대신 자운 스님이 취임1955. 9. ~1957. 7.하였다. 가을에 파계사 성전암에 철조망을 두르고 10여년간 두문불출하며 외부의 출입을 막았다. 이것을 후세에 “10년 동구불출”이라고 불렀다. - p 90

54세 1965년, 乙巳, 불기 2992, 中華民國54, 昭和40

경북 문경의 김용사金龍寺에서 조실로 머물렀다.
4월 30일에 동산 스님이 입적하였다. 1967년에 세운 동산 스님 사리탑비의 비문을 지었다.
9월 1일 대학생불교연합회 회원들의 13일간의 구도행각 중에 김용사를 방문하자 3천 배를 시켰다. 9월 2일부터 이틀에 걸쳐 “불교의 근본사상인 이변離邊중도로부터 시작하여 불교에서 본 우주의 실상, 우리가 이 실상과 하나가 될 수 있는 가능성, 그 방법론 등”을 현대학문의 방증을 들어 설법하였다. - p 101

56세 1967년, 丁未, 불기 2994/2511, 中華民國56, 昭和42

또한 이날, 이틀 후7월 25일에 해인사에서 열릴 종회에 앞서 중대 논의를 위해 청담 종정의 소집으로 70여 명의 중진 스님이 모인 종단중진회의가 해인사에서 열렸다. 성철 스님도 참가하였다. 중진회의는 25일 정오까지 이어져 자연스럽게 제16회 임시중앙종회 본회의로 이어졌다. 이 회의에서 해인사에 방장 체제의 해인총림 설치가 결의되면서 성철 스님이 해인총림 방장에 추대되었다.
10월 20일음 9월 17일 선림회 제2회 임시총회가 해인사에서 열려 80여 명의 회원이 모였다. 회의에서 성철 스님의 시중법어示衆法語가 있었다. 회의가 끝나고 3일간 스님의 법문이 있었다. 내용은 깨달음의 강조와 돈오돈수 설파, 증도가 강설이었다. - p 127

70세 1981년, 辛酉, 불기 2525, 中華民國70, 昭和56

1월 10일 정화중흥회의 체제에서 원로회의가 열려 종정에 성철 스님을 추대하였다.
1월 20일 조계종 제6대 종정 취임식에는 나가지 않으셨다. 대신 취임 법어를 취임식장에서 원로원장 영암 스님이 대독하였다. 1월 20일은 음력 12월 보름이었으므로 스님은 총림에서 대중법문을 하였다.
이후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법어가 화제가 되었다. - p 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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