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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999..태어나기 전의 너는 무엇이었나 (서암 큰스님 평전) (이청 저) (해외배송 가능상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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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서적 999..태어나기 전의 너는 무엇이었나 (서암 큰스님 평전)

저자 : 이청
출판사 : 북마크
발행일 : 2009. 10. 15
페이지수/크기 : 259쪽 l A5

[책소개]
생전 서암스님과의 대화록 『태어나기 전의 너는 무엇이었나』. 작가 이청(李淸)이 저술한 책은 대부분 불교의 정신세계를 천착한 것이 특징이다. 이는 작가가 문학을 통하여 인간의 존재가 지닌 궁극적 가능성을 끝없이 모색해온 과정의 산물이다. 이 평전(評傳)은 서암 스님과의 남다른 인연을 작가가 정리한 것이다. ‘한국 불교의 발전’과 서암불교에 목마른 독자를 위해 꼭 출간되어야 할 책이라는 주위의 간절한 바람이 있었다.

[출판사 서평]
생전 스님과의 대화록으로 재생시킨 서암불교(西庵佛敎)의 진면목

작가 이청(李淸)이 저술한 책은 대부분 불교의 정신세계를 천착한 것이 특징이다. 이는 작가가 문학을 통하여 인간의 존재가 지닌 궁극적 가능성을 끝없이 모색해온 과정의 산물이다. 이 평전(評傳)은 서암 스님과의 남다른 인연을 작가가 정리한 것이다. ‘한국 불교의 발전’과 서암불교에 목마른 독자를 위해 꼭 출간되어야 할 책이라는 주위의 간절한 바람이 있었다.

서암(西庵) 스님과 봉암사(鳳巖寺)

문경(聞慶)의 희양산(曦陽山) 봉암사는 조계종의 2,500여 사찰 중 유일하게 산문(山門)을 닫고 일반인의 출입을 막고 있는 특별 수도원으로 동방 제일의 수행도량이다. 봉암사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선종의 가풍이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곳으로, 한국 불교의 현대사에서 새로운 흐름을 창출한 결사도량으로 유명하다.
1947년 성철 스님을 필두로 청담, 자운, 우봉 스님이 황폐해진 한국 불교를 바로잡겠다는 원을 세우고 결사 도량을 찾은 곳이 바로 봉암사였다. 이후 행곡, 월산, 종수, 보경, 법전, 성수, 혜암, 도우 등이 이 결사에 참여하여 공주 규약을 제정하고 추상 같은 법도를 세워 오늘날 수행의 근간을 세웠다. 이를 ‘봉암사 결사’라고 한다. 이 결사 정진이 6?25로 인해 잠시 중단되었다가 70년대부터 다시 수좌들이 봉암사에 모여들었다. 향곡, 서옹 스님을 조실로 모시고 납자를 제접했다.
1980년부터 서암 스님이 정식으로 태고선원 조실로 모셔지며 봉암사는 웅비한다. 조계종은 선풍 진작과 종단 발전을 위해 봉암사를 종립선원으로 결정한다. 봉암사는 한국 불교의 성지이다. 한국 불교는 달마조사의 선맥을 이어왔는데 그 뿌리를 찾아 올라가면 구산선문이 근간이 된다. 그 구산선문 중 하나가 희양산문의 종찰인 봉암사이다.
서암 스님은 탈종(脫宗) 후 2001년 하안거 결제에 다시 조실로 추대되어 대중 스님들을 지도하시다 2003년 3월 29일 열반하실 때까지 봉암사와는 말 그대로 하나였다.

타고난 자유인

서암은 평생을 ‘자유’를 갈망했고 ‘자유’ 안에서 살았다. 자신의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되면 아무런 미련 없이 자리를 박차고 나왔으며, 주어진 곳에서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되면 또 떠났다. 자신의 손에 있던 것들을 훌훌 털고 산속으로 돌아가기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 일이 있으면 몸을 아끼지 않고 맡아서 했으되, 일에 따른 감투에 연연하지 않았다.
성철 스님이 열반에 들자 종정의 자리에 앉게 된 서암 스님은 종단을 바로 세우는 데 진력을 다했다. 그는 한국 불교의 발전을 위한 일이라면 떠밀려 앉게 된 자리라도 최선을 다했으며 진정한 부처가 되는 길을 많은 사람에게 알리기 위해 스스로 본이 되었다. 누군가 해야 할 일이라면 자신의 이름을 아끼면 뭐하겠냐는 서암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들이 평생 절 밥을 먹은 자의 도리라고 했다. 이렇게 자리에 연연하기보다 일에 욕심이 많았던 서암이 탈종단을 선언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가 종단을 떠난 이유도 ‘자유’이다. 종단과 문중을 두고 세력을 두고 끊임없이 다투던 한국 불교를 두고 볼 수가 없어서 자유로운 불자의 길을 그는 택했다. 종단이라는, 문중이라는 틀 안에서 살고 싶지 않았던 서암은 다시 자유라는 길을 향해 나이 든 자신의 발을 내딛은 것이다. 스님의 탈종단 선언은 자유를 향해 종단이라는 벽을 넘고 경계를 무너뜨린 최초의 거사라고 작가 이청은 밝히고 있다.
그가 외치는 ‘자유’의 시작은 언제부터일까? 바로 그가 죽음을 마주했을 때부터이다. 동경 유학 당시 얻은 폐병은 그를 죽음과 마주하게 했다. 곧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지자 그는 어떻게 죽은 것인가에 대한 문제만을 고민했다. 죽음이 눈앞에 와 있고 그것을 피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니 홀가분해졌고 바로 그 순간이 태어난 후 처음으로 맛 보았던 자유라고 그는 고백한다. 그 고백을 할 당시도 그는 자유로웠으리라.
그에게 왜 자유가 필요했을까? 이 늙은 남자에게 왜 자유가 필요한가? 조실스님과 종정을 거치면서 가고 싶은 곳을 갈 수 없었고,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날 수 없고, 보통 사람들에게 불법을 전할 기회도 많지 않았다는 그의 고백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불법을 전하고 싶었는지 알 수 있다. 그렇지 못했던 그때의 상황을 회상하며 자유를 택한 그는 일반 스님이 아닌 일반 사람들에게 불법을 전하며 ‘자유’를 누렸다. 아주 빡빡하게 잡힌 스케줄 속에서 서암은 아주 즐거워 보였다고 이청은 말한다. 이런 즐거움을 위해 그에게 자유는 필요했던 것이다.
그는 타고난 자유인이었다.

마음이 곧 부처다-불교의 가르침이란 꿈에서 깨게 하는 것

서암은 불교의 체(體)와 용(用)은 다르지 않고 하나라는 일원론을 말하면서 색즉시공(色卽是空)이 바로 진리라고 말한다. 마음과 그 마음을 통해 부처를 기다리는 마음이 별개가 아니라는 것이며 불교의 일체유심조(一切維心造), 즉 모든 것이 마음에서 일어난다고 했다.
여여부동(如如不動)하여 시간과 공간에 구애를 받지 않고 항상 존재하는 자기 인생의 근본을 바로 보아야 한다. 시공간의 구애를 받지 않는 것이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사람은 누구나 항상 스스로 앉고 스스로 일어나는 자기의 부처를 가지고 있다고 서암은 가르친다. 청정무구하고 언제나 한가하며 고요한, 부동의 자기의 존재는 우리의 귀, 입, 코를 보지 못하는 눈과 같다. 한 몸에 있으면서도 그 존재를 보지 못하지만 분명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보지 못한다고 하여 귀, 입, 코가 없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와 같다. 우리의 마음이 부처자리인데 그것을 보지 못한다고 하여 그 자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온갖 생각에 마음의 정체를 알기가 쉽지 않고, 알았다고 한들 그 본래의 마음자리를 바로 보기가 용이하지 않다. 자신의 본마음을 등지고 살기 일쑤인 요새, 불교는 마음의 정체를 밝히며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자리를 깨닫게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것인가. 우리가 어머니의 태 안에서 존재하기 전에는 어디에 있었는가. 이러한 물음에 서암은 인간의 근본은 불생불명이며 무시무종이라고 말한다. 우주의 만물은 소멸되는 것이 없고, 새로 만들어지는 것이 없는 불교의 가르침에 주목해야 한다. 참선을 통해 눈이 밝아지면 비로소 어머니의 태 안에 있을 때, 또 그 이전의 내가 어디 있었는지도 훤히 알 수 있다. 불자의 수행은 무명으로 일어나는 연기의 법속에서 상실된 진정한 자기 본성을 되찾는 과정이라고 서암은 말했다.


西庵 큰스님 行狀

1914년(탄생)
경상북도 풍기읍 금계동 506번지에서 부친 宋東植과 모친 申東卿 사이에서 5남 1녀 중 3남으로 출생. 이름은 鴻根이었다. 모친은 고목에 꽃이 피는 태몽을 꾸었다고 한다. 부친 송동식이 항일 독립운동에 가담하면서 집안이 몰락하여 형제들은 살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지고 3남 홍근은 모친과 함께 산중 화전민이 버린 땅을 찾아 연명하거나 패쇠한 숯가마 자리에서 기식하는 등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도 모친의 정성으로 충북 단양군 대강면의 대강보통학교 및 예천의 대창학원에서 신식학문을 배웠다.
1932년(절집 머슴으로)
먹고살기가 힘들고 배움에 굶주렸던 홍근은 醴泉 西嶽寺(주지 華山 스님)에 2년 기한으로 절집 머슴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3년이 지났을 때야 주지 화산 스님은 그를 金龍寺에 소개하여 정식 출가의 길을 열어주었다.
1935년(출가)
경북 문경 김용사에서 화산 스님을 은사(恩師)로, 낙순 스님을 계사(戒師)로 하여 사미계(沙彌戒)를 수계하고 정식 출가했다. 수계 이후 홍근 스님은 김용사 강원(講院)에서 수학했다.
1937년(비구계 수계)
강원에서 학인으로 수학 중 金烏 선사를 만나 크게 영향을 받았으며, 이 해 김용사에서 금오 스님을 계사로 하여 비구계(比丘戒)와 보살계(菩薩戒)를 수지하고 대덕품계(大德品階)를 품수하였다. 법호를 西庵이라 하였다.
1938년(일본 유학)
강원에서 내전(內典)을 보는 동시에 독학으로 유학을 준비하여 마침내 종비장학생 자격으로 일본대학교 종교학과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일본에서 신문 배달, 건설 노동, 폐품 수집상 등을 전전하며 유학생활을 계속하다가 당시로는 사형선고나 다름이 없는 폐결핵 말기 진단을 받고 학업을 중단한 채 1940년 귀국했다.
1941년(대창학원 강사)
각혈을 하면서도 모교인 대창학원에서 생애의 마지막 봉사라는 각오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42년(김용사 선원에서 안거)
다가오는 죽음을 기다리는 자세를 돌이켜 삶과 죽음의 경계를 스스로 허물기 위하여 김용사 선원에서 안거하기 시작했다.
1943년(深源寺 강사)
김용사에서 안거하다 북쪽으로 만행을 떠나던 중 철원 심원사에 들러 1년 동안 강원에서 화염경을 강의했다.
1944년(금강산 摩訶衍에서 하안거)
심원사를 떠나 금강산 마하연에서 안거하고 묘향산, 백두산 등을 거친 후 다시 남쪽으로 내려와 大乘寺 바위굴(천연동굴)에서 性徹 스님 등 도반들과 안거했다.
이 무렵 말기에 이르렀던 폐결핵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1945년(불교청년운동 시작)
대승사에서 靑潭, 性徹 등과 수행하던 중 해방을 맞았다. 예천의 대승사 포교당에서 징병, 징용에서 돌아온 귀국자들을 도와 보금자리를 마련해주는 등 보살행을 실천하고 불교청년운동을 시작했다.
1946년(깨달음)
계룡산 나한굴(羅漢窟)에서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살아서 이 동굴을 나가지 않으리라’는 각오로 단식 용맹정진하던 중 본무생사(本無生死)의 도리를 깨닫고 활연대오했다.
1947년(해인사와 망월사에서 안거)
海印寺의 曉峰 스님 회상에서 하안거하고 望月寺에서 金烏 스님을 모시고 동안거 정진했다.
1948년(七佛庵 決死精進)
지리산 칠불암에서 道川 등 몇 사람의 도반들과 함께 금오 스님을 모시고 ‘죽어도 좋다’는 각오로 결사정진했다.
1949년(금오 스님과 더불어 용맹정진)
滿空 스님 회상의 定慧寺와 漢岩 스님 회상의 上院寺, 그리고 해인사 망월사, 속리산 복천암, 계룡산 정진굴, 대승사, 묘적암 등지에서 정진을 계속했다. 이 무렵 금오 스님과 각별한 인연으로 함께 수행하여, 지리산 칠불암을 비롯하여 광양의 上白雲庵, 보길도의 南隱庵, 계룡산 獅子庵 등에서 금오 스님을 모시고 정진을 계속했다. 특히 칠불암에서의 ‘죽기 살기 식’의 정진은 지금까지도 유명한 일화로 회자된다.
1952년(圓寂寺 주석)
1952년부터 문경군 농암면에 있는 圓寂寺에 주로 주석하며 폐허가 된 절을 중창하고 선풍을 진작함.
1970년(鳳巖寺 祖室 추대)
1970년 문경군 가은면의 봉암사 조실로 추대되었으나 사양하고 선덕(善德)소임을 자청하여 원적사를 오가며 수행가풍을 바로 세우는 일에 진력하였다. 이후 1979년 다시 봉암사 조실로 추대되자 이 때 비로소 받아들여 봉암사의 조실로 주석하며 9산선문의 하나였던 봉암사 선원을 조계종 종립선원으로 제정케 하는 등 현대 한국 불교 선풍 진작의 본원지로 만들었다.
1975년(조계종 총무원장)
제10대 조계종 총무원장을 맡아 어려운 종단사태를 수습하고 2개월 만에 사퇴한 후 산사로 돌아가 납자를 제접하는 등 선풍 진작에만 전념했다.
1991년(원로회의 의장)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으로 추대됐다.
1993(조계종 제8대 종정)
성철스님 열반 후 후임으로 제8대 조계종 종정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94년 봄 종정직과 봉암사 조실을 모두 사임하고, 종단마저 탈퇴한다고 공표한 후 훌훌히 수행자로서의 길을 떠났다. 이후 언론과 종단의 관심을 피하여 거제도 토굴, 삼천포와 팔공산의 사암을 거쳐 태백산 자락(봉화군)에 가건물을 지어 無爲精舍라 이름하고 무위자적의 생활을 하며 간혹 요청이 있으면 원근과 근기를 가리지 않고 흔쾌히 나아가 법문을 했다.
2001년(봉삼사 조실 복귀)
봉암사 대중들의 간청에 의하여 8년 만에 봉암사 염화실로 돌아갔다. 이 때 이미 스님은 중환(뇌졸중)이었다.
2003년(열반)
3월 29일 아침 7시 50분 봉암사 염화실에서 열반했다. “한 말씀 남기시라”는 제자들의 거듭된 요청에 스님은 “그 노인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갔다고 해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떠났다. 4월 3일 전국수좌회의장으로 봉암사에서 다비가 행해졌으나 생전 스님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사리를 수습하지 않았다.

[목차]
1. 몇 장의 삽화-절이 있는 풍경
배고픈 부처님
문학
법난(法難)
말장난
국수
서울
대각사
오두막

2. 밥 짓는 이야기
첫째 날
사람 냄새 / 대착학원 / 열다섯 절집 머슴살이 / 일제(日帝)의 개꿈
둘째 날-유학
배울 수만 있다면 지옥인들 / 골병 / 떠돌이 치과의사의 조수 / 수드라에게도 영혼이 있을까 / 고물장수에서 건설 현장 노가다로 / 두 번째 사신(死神)의 방문 / 자유
셋째 날 - 중도파
무심 / 금강산 / 이판과 사판 / 계룡산 / 도인(道人)과 거지 / 칠불암(七佛庵)의 사생결단(死生決斷) / 유시(諭示)
넷째 날 - 닭 벼슬
경상북도 종무원장 감투 / 꿀단지 / 먹이 싸움
다섯째 날- 양산박
구산선문(九山禪門) 희양산 / 조실(祖室)과 문지기
여섯째 날-宗正
아름다운 회향(回向) / 성철 종정 재추대 / 개혁 - 부처님 법대로 / 종정에서 자유인으로 / 사자산의 구렁이
일곱째 날 - 태어나기 전의 나는 무엇이었나?
내가 없는데(無我), 내 마음은 어디 있는가 / 참선(參禪) - 쉬는 것 / 화두(話頭) / ‘바라는 것’과 ‘실재하는 것’ / 나는 깨친 것 없다

3. 웃음
감성(感性)과 불성(佛性)
보살행(菩薩行)
무위정사(無爲精舍)
보살님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갔다고 해라

[책속으로]
- 사람은 누구나 앉으나 서나 항상 스스로 앉고 스스로 일어나는 자기의 부처(마음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주인공은 어지럽지도 않고 더럽지도 않습니다. 청정무구하고 언제나 한가하며 고요합니다. 그렇게 일체 경계에 흔들리지 않는 자기를 발견하는 것을 해탈이라고 합니다. 그런 부동의 자기가 존재하느냐? 우리가 귀나 입이나 코를 볼 수는 없으면서도 정작 눈을 보지는 못합니다. 보지 못한다 하여 눈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요. 우리 마음이 부처자리인데 그것을 보지 못한다고 그 자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불교는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 마음의 정체를 밝히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정체를 분명히 알기란 쉽다면 쉽고, 또 어렵다면 한다면 한없이 어렵기도 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항상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온갖 생각에 사로잡혀 그 ‘본래의 마음자리’를 바로 보기가 용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근본 마음만 바로 알아버리면 모든 문제가 분명하게 밝아지지만, 그렇지 못하면 무한히 일어나는 희로애락의 상념, 생각으로 끌려가서 본 마음자리를 망각하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 생각은 마음의 그림자일 뿐이며, 마음의 파도입니다. 그러므로 그 생각에 따라가지 말고 생각이 일어나는 초점, 생각이 일어나는 뿌리를 돌이켜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할 때, 그 자리에는 일체의 고통, 즉 갈등과 불안, 초조가 일어날 수 없지요. 그런데 이것이 용이하지 않고 항상 생각의 반복 속에서 헤매게 되는 것은 다생겁래(多生劫來)로 그 습관에 젖어 생활해온 탓입니다. 이를 불교에서는 업력(業力)이라고 합니다.

- 선을 불교라는 종교의 좁은 틀 속에서 이해하려고 하면 오히려 본질에서 멀어지고 이해하기도 어려워진다. 선은 불교의 전매특허가 아니다. 나아가 불교 그 자체도 불교라는 이름이 없는 것이 진정한 불교다. 불교라 부르면 이미 거추장스러운 누더기를 하나 덮어씌운 것과 같은 꼴이 되고 만다. 불교가 어디 따로 있는가. 정신 차리고 살자는 도리가 불교일 뿐이지, 거기에 복잡한 종교적 교리와 교의를 만들어 덧칠을 하는 것은 모두 헛된 일이다.

- 사람들이 본시 자기가 부처인 줄 모르고 헤매고 다니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니, 어찌하여 자기 속의 부처를 찾지 못하고 밖으로 찾아 헤매며 고통 속에 젖어 있는가, 부처님은 그것을 탈피하여 참된 자유를 찾으라고 가르친 것이고 그 길이 바로 참선인 것이다. 생명의 실체는 무시무종(無始無終)이라 천지만물이 생기기 이전의 공겁(空劫)부터 존재해왔던 것으로 시작도 끝도 없는 것이 인간의 생명이다. 그 자리에 굳이 이름을 붙여 부처라고 하는 것뿐이다. 또 생명은 모두 동등하여 사생(四生)이 동본(同本)이다. 여기에는 원래 중생이니 부처니 하는 차별의 이름이 없다. 그런데 본바탕에서 한 생각이 어긋나 사생육도가 벌어지는 것이다. 사람의 도리를 하면 사람이 되는 것이고 짐승의 도리를 하면 짐승이 되는 것이다.

- 사람이 꿈을 꾸고 있을 때 육체는 방 안에 누워 있으나 영혼은 구만 리 장천을 날아 자유롭게 다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도 따지고 보면 꿈속의 정신 작용이 육체를 떠나 자유롭게 다니는 것이 아니라 육체라는 그릇 속에서 온갖 망념을 일으키고 있는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영이 없는 육도 없고 육이 없는 영도 없다. 이를 가장 절묘하게 표현한 것이 색즉시공(色卽是空)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란 표현은 참으로 사물의 이치를 정곡으로 꿰뚫은 오묘한 이치다. 색(色)은 모양이 있는 것, 공(空)이란 모양이 없는 것인데 모양이 있는 것이나 모양이 없는 것이나 모두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뜻이다. 육체와 영혼의 관계가 바로 그것이다.

[저자 소개]
저자이청
이청은 1945년 울산의 바닷가 마음에서 태어나 고등학교와 대학 시절 출가와 환속을 거듭하고 여러 학교를 전전하는 등 방황하다가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을 계기로 문학인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교사, 기자, 르뽀작가, 사사 편찬 등 여러 집업을 전전하고 2002년 이후로 비로소 늦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의욕을 불태우며 창작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저서로는 <사바행> <회색의 봄> <우리들의 초상> <무덤 속의 축제> <부처님 동네> <우리 옆에 왔던 부처> <사리> <바람처럼 흐르는 구름처럼> <13월의 사랑> <신의 여자> <대한국인 안중근> 등 소설과 <화두의 향기> <이 뭣고> <제3공화국 경제비화> 등 소설 아닌 책들이 있다. 사는 곳은 용인시 수지의 광교산 자락이다. 글에 밝혀 놓은 바와 같이 서암 큰스님과는 오랜 인연이 있어 큰스님 열반 이후 서암불교를 제자리에 세워놓겠다는 열정을 가지고 취재를 계속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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