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상품목록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서적 2702..그대 보지 못했는가 (서암 큰스님 회고록) (해외배송 가능상품)

기본 정보
소비자가 16,000원
판매가 14,400원
상품코드 P0000KFA
수량 수량증가수량감소

개인결제창을 통한 결제 시 네이버 마일리지 적립 및 사용이 가능합니다.

상품 옵션

(최소주문수량 1개 이상 / 최대주문수량 0개 이하)

수량을 선택해주세요.

위 옵션선택 박스를 선택하시면 아래에 상품이 추가됩니다.

상품 목록
상품명 상품수 가격
서적 2702..그대 보지 못했는가 (서암 큰스님 회고록) 수량증가 수량감소 (  0)
총 상품금액(수량) : 0 (0개)

이벤트

WISH PRODUCT LIST

불교서적 2702..그대 보지 못했는가 (서암 큰스님 회고록) 

저자 : 서암스님 / 역자 : 이청
출판사 : 정토출판
발행일 : 2013. 04. 07
페이지수/크기 : 444쪽 |A5ㅣISBN-10 : 898596173X | ISBN-13 : 9788985961738

[책소개]
내 인생의 지침, 혼돈의 시대를 구해줄 서암 스님의 수행과 깨달음을 담았다!

『그대 보지 못했는가』는 서암 큰스님이 직접 구술한 내용을 이청 작가가 엮은 회고록이다. 서암 스님의 출가와 수행, 구도와 깨달음의 여정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으며 종단 개혁 과정에서 발생했던 ‘종정사퇴’에 대한 서암 스님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 특히 1994년 종단개혁 당시 ‘서암 스님’에 대한 오해와 잘못된 평가 및 왜곡을 바로잡고, 불법을 수호하는 수행자로써 명예를 되찾아 평가받을 수 있도록 조명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서암 스님은 해방이후 왜색화된 한국불교를 정화한다는 목적으로 불러들였던 폭력이 오늘날까지 불교 발전을 저해하는 근본 요인이라고 지적한다. 다중의 힘을 과시하여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은 폭력이라고 설명하며, 폭력적인 해결방법은 세속의 방식이고 불교의 가르침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경제적 풍요로움 앞에서도 행복하지 못하는 현대인들을 위한 새로운 대안으로써 서암 스님의 검소한 삶과 깨달음이 담긴 말씀을 제시하고 있다.

[출판사서평]
전 조계종 종정 서암 큰스님의 수행과 깨달음
서암 큰스님의 회고록 <그대, 보지 못했는가> 출간

힐링이 필요한 현대인들에게 던지는 사자후
혼돈의 시대, 마음찾기의 나침반이 될 서암스님의 수행과 깨달음 이야기

서암 큰스님. 한국 최고의 선승禪僧. 한평생 수행자로만 살았다. 지리산 칠불암에서 도반들과 더불어 ‘공부하다 죽어도 좋다’고 서약하고 정진한 일화가 유명하다. 1978년 봉암사 조실로 추대되어 일반 관광객의 출입을 금지시켜 엄격한 수행 가풍을 진작해 봉암선원을 조계종 특별종립선원으로 만들었다. 1993년 12월 대한불교조계종 제8대 종정으로 추대되어 재임 140일 만인 1994년 4월에 사임하고 종단을 떠났다.
평생을 선 수행을 바탕으로 법문하고 공부했던 스님은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쉬운 ‘생활선禪의 법문’으로도 많이 알려져 있다. 스님은 언제나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하며 검소하고 소박하게 살아가셨다. 몸으로 실천했던 큰스님의 모습은 지금도 수행자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서암 큰스님의 회고록 ≪그대, 보지 못했는가≫는 서암 큰스님이 직접 구술한 내용을 이청 작가가 엮은 책이다. 서암 큰스님의 출가와 수행, 구도와 깨달음의 여정을 생생하게 볼 수 있고, 또 종단 개혁 과정에서 발생한 ‘종정사퇴’에 대한 큰스님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

책 소개

법륜 스님의 인생의 전환기를 마련해 준 정신적 스승, 서암 스님

“여보게, 어떤 한 사람이 논두렁 밑에 조용히 앉아서
그 마음을 스스로 청정히 하면,
그 사람이 바로 중이요,
그곳이 바로 절이지.
그리고 그것이 불교라네.”


젊은 시절, 불교계의 현실에 대해 고민이 많았던 법륜 스님은 1980년대 미국의 LA의 작은 사찰에서 노스님 한 분을 만난다. 법륜 스님은 노스님의 이야기에 불교 운동이라는 이름에 매몰되어 있던 자신의 삶을 각성하고 인생의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 노스님이 바로 제8대 조계종 종정이며 한국 최고의 선승이신 서암 큰스님이었다.

전 조계종 종정, 한국 최고의 수도선원인 봉암사 조실 등 서암 큰스님에 대해서는 다양한 수식어가 붙지만 서암 큰스님의 삶을 표현할 수 있는 한마디는 자유와 원칙이다. 일본 유학시절 중증 폐결핵 진단을 받고 귀국한 서암 큰스님은 처음 출가하셨던 김용사에서 마지막 삶을 다한다는 각오로 용맹정진 하셨다. 용맹정진 하던 스님은 ‘생명, 그것은 곧 마음이니, 내 마음 밖에 죽고 사는 문이 따로 있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의 육신을 보며 깨닫는다. 이후 스님께서는 평생을 하나의 원칙을 지니고 살아갔다.

그 원칙은 ‘중생의 고통을 덜어주는 일을 하더라도 불법에 맞게 수행하는 자세로 하면 산속에서 정진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으며, 산속에 앉아 홀로 정진하더라도 뭇 중생의 고통을 잊지 않으면 자비 실천에서 동떨어지지 않는다’ 는 것이었다. 이러한 원칙으로 세상과 종단 그리고 여러 불자들이 원한다면 어떤 일이라도 맡아 사심 없이 직무를 수행했다. 그러다가 주어진 직무를 제대로 해나갈 환경이 되지 못할 때는 아무 미련도 없이 그 ‘자리’를 내던지고 수행자의 본분으로 돌아왔다. 해방 후 경북 종무원장 시절부터 조계종 총무원장, 원로회의 의장, 종정에 이르기까지 스님은 이 원칙에 벗어나지 않게 직책을 맡고 또 미련 없이 내려놓고 사문으로 돌아오시기를 반복했다. 불교의 근본원칙 하나를 갖고 스님은 문중, 역할, 종단에 구속되지 않은 자유인 그 자체로 평생을 살다가셨다.

생활 선禪, 내 마음을 찾는 법
평생 선 수행을 바탕으로 법문하고 공부했던 스님은 일반인들도 이해하기 쉬운 ‘생활선의 법문’ 으로 알려져있다. 선에 있어서도 생활 속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선이란 것은 어디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생활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손 움직이고 발 움직이고 울고 웃고 이웃 간에 대화하는 그 속에서 24시간 내 모습을 온전히 찾아가는 것, 그것이 생활선” 이라는 것이 스님의 가르침이었다.

우리는 바쁜 일상을 살아간다. 항상 바쁘게 생각하고 행동하지만 정작 현재의 나를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자신의 본마음을 알아채지 못하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불교는 마음의 정체를 밝히며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자리를 깨닫게 하는 것이라 알려준다. 그리고 그 자기의 마음자리를 깨닫는 방법을 선禪이라고 했다. 그래서 출가승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이 선이다. 그리고 선은 불교의 전매특허가 아니라고 말한다. 혼돈과 고통으로 얼룩진 정신세계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현대인들이 자기 본래의 진면목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참선이고 생활선이라 하셨다.

종단분규, 종정 탈퇴와 탈종 그 오해와 진실
서암 스님은 해방이후 왜색화된 한국불교를 정화한다는 목적으로 불러들였던 폭력이 오늘날까지 불교 발전을 저해하는 근본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비록 대의와 명분은 옳았어도 그 방식이 문제라면 불교적 입장에서는 정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꼭 물리적인 것이 아니더라도 단식이든 집회든 다중의 힘을 과시하여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은 폭력이며 폭력적인 해결방법은 세속의 방식이고 불교의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이 스님의 뜻이었다.

1994년 종단개혁 당시, 대중의 힘과 폭력으로 해결하려는 것을 부정하고 막으려 했다. 대중들은 내편 ㆍ네편으로 나눠 대중의 힘을 모으는 과정에서 ‘서암 스님은 우리 편이 아니다’는 오해와 더불어 ‘개혁의 대상’으로 몰아갔다. 비불교적인 방법에 대해 불교적인 원칙을 제시하며 서암스님은 종정을 사퇴하고 종단밖으로 나갔다.

일련의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잘못 평가되고 왜곡되는 부분에 있어서 서암 큰스님 열반 10주기를 맞는 지금, 서암 스님의 종정사퇴와 탈종은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수행자로써 최대의 명예로움으로 다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그 노장, 그렇게 살다 그렇게 갔다고 해라
열반에 들기 전 시봉하던 제자들이 스님께 한 말씀 해주시기를 간곡히 청하자 스님께서 한마디 했다.
“그 노장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갔다고 해라.”
게송도 아니고 법문도 아닌, 평범하기 그지없는 말. 그러나 부처님을 비롯하여 이 세상의 불교 전체를 아우르고 질타한, 가장 불교적인 한마디였다.

무언가 드높고 복잡 미묘한 경지를 이르면 가치롭게 여기는 풍토에서 스님의 담백한 한 말씀은 이런 세태를 꼬집어주는 것만 같다.

서암 큰스님 열반 10주기를 맞아 큰스님의 수행과 깨달음을 담은 회고록을 출간하는 이유는 삶이 풍요로워지면서도 정신적으로 행복하지 못하는 현대인들에게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고 청량수와 같은 시원함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분의 검소한 삶과 깨달음의 말씀을 통해 우리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행장

서암 홍근 대종사 西庵 鴻根 大宗師
1914~2003

성姓은 송宋, 이름은 홍근鴻根이다. 1914년 10월 8일 아버지 송동식宋東植과 어머니 신동경申東卿사이에서 5남 1녀 중 셋째로, 어머니가 ‘고목에서 꽃이 피고 수많은 별들이 쏟아지며 거북이 나타나는’ 태몽을 꾼 다음 경상북도 풍기읍 금계동에서 태어났다.

절개가 굳은 의인이셨던 아버지는 일제치하에 풍기 일원의 독립운동단체 지도자로 활약하셨다. 이런 까닭에 가족은 삶의 터전을 잃고 안동, 단양, 예천, 문경 등지를 떠돌 수밖에 없었고, 스님은 유년시절을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보냈다.

“많이 배워라. 기상을 죽이지 마라”는 아버지의 가르침과, 헌신적인 어머니의 희생 덕분에 동네 서당과 단양의 대강보통학교, 예천의 대창학원 등에서 품팔이를 하면서 한학과 신학문을 배웠다.

인간의 삶과 진실, 세계와 우주의 질서, 그 비밀에 접근하는 열쇠를 발견한 것처럼 책을 탐독했고, 틈만 나면 사유와 사색에 젖어 들었다. 그중에서도 러시아 작가들의 책을 즐겨 읽었다.

타고난 영민함, 박학다식 그리고 깊은 사색으로 인생에 대한 진지한 논쟁을 여러 사람들과 나누었는데 어린 나이였지만 필적할 만한 이가 없었다.

그러던 중 “책이나 선생들로부터 들은 것 말고 단 한마디라도 좋으니 네 자신의 이야기를 해보라” 는 예천 서악사 화산華山스님의 말씀에 최초로 부끄러움을 배우고 “제 인연은 스님에게 있습니다.” 라는 말과 함께 머슴과 같은 행자생활을 하게 되었으니 15세(1928년)의 일이다.

고된 생활 가운데에서도 당시 대강백이셨던 화산 스님께 초발심 자경문初發心自警文, 치문緇門, 의식儀式 등을 틈틈이 배우며 출가 수행자로서 기반을 다졌다.

은사 되시는 화산 스님이 3년이라는 긴 행자생활을 지내도 사미계沙彌戒를 줄 생각이 없자, 당시 경허鏡虛스님과 교분이 있던 장진사라는 분의 간청에 의해 비로소 본사인 김용사에서 19세(1932년)의 나이로 낙순 화상을 계사로 모시고 사미계를 받았다. 법명은 홍근鴻根, 수계 후 김용사 강원에서 수학하였다.

22세(1935년)에 김용사 강원생활 중 금오金烏스님을 모시고 보살계와 비구계를 받고, 이후 대덕법계를 품수하게 되었다. 법호를 서암西庵으로 받았다. 김용사 강원에서 동학同學가운데 출중하여 가히 군계일학群鷄一鶴이라 할 만 하였다.

타고난 학문에 대한 열정으로 일본 유학을 결심한 후 강원에서 내전內典을 보는 동시에 독학으로 유학 준비를 하여 25세(1938년)에 종비장학생으로 가난한 유학길에 오른다.

선진 학문을 접하면서 넓어지는 안목의 변화에 하루하루 가슴이 벅차올랐으나 이를 위해서 힘든 노동과 배고픔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자신도 모르게 육체는 깊은 병을 만들어 가고 있었고, 결국 당시에는 사형선고와 같은 폐결핵이라는 진단을 받게 된다. 귀국하여 ‘세상에서의 마지막 봉사’ 라는 생각으로 각혈을 하면서도 모교인 대창학원에서 1년 동안 학생들을 지도하였다. ‘시한부인생’이라고 생각하며 남은 정열을 쏟아 부었으나 죽음은 쉽게 오지 않았다. ‘생사의 근본도리!’ 이것이 저절로 스님에게는 화두가 되어 있었다.

죽음만을 기다리며 사는 것이 헛되다고 돌이키며 28세(1941년)에 김용사 선원에서 수선안거修禪安居에 들어갔다. 여름과 겨울이 지나가면서 마음은 맑아지고 몸은 가벼워졌다.

이듬해 봄이 되어 북쪽으로 만행하던 중, 철원 심원사에서 스님의 학식을 흠모하는 여러 스님들의 간청에 못 이겨《화엄경》을 1년간 강의하였다.

이후 금강산 마하연과 신계사에서 여름 안거를 마치니, 어느덧 몸에 있던 병마는 흔적 없이 사라졌다. 가을이 되자 다시 길을 떠나 묘향산, 백두산 등지를 거쳐 다시 남쪽으로 내려와 문경 대승사의 천연동굴에서 성철性徹스님과 함께 용맹정진 하였다.

32세(1945년)에는 광복이 되자 산에서 내려와 예천포교당에 머물며 징병ㆍ징용당하여 죽음의 땅에서 돌아온 동포들에게 보금자리를 마련해 줌과 동시에 불교 청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듬해에는 계룡산 골짜기에 있는 ‘나한굴羅漢窟’ 이라는 천연동굴로 들어갔다.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살아서 이 바위굴에서 나가지 않으리라!’ 이와 같은 목숨을 건 정진으로 머리는 산발하고 뼈만 앙상하게 남았으나, 의식은 오히려 맑아졌다. 나중에는 잠도 잊고 먹는 것도 잊은 채 선정삼매禪定三昧의 날들을 보내다가, 한순간 탄성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본무생사本無生死라!
삶과 죽음의 경계마저 한갓 공허한 그림자처럼 사라진 것이다.

계룡산에서 내려온 뒤에도 수행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만공滿空스님 회상의 정혜사와 한암漢岩스님 회상의 상원사 그리고 해인사, 망월사, 속리산 복천암, 계룡산 정진굴, 대승사 묘적암 등지에서 계속 정진하셨다.

33세(1946년)부터 35세(1948년)까지 금오金烏 스님과의 인연은 각별했다. 지리산 칠불암과 광양 상백운암, 보길도 남은사, 계룡산 사자암에서 금오 스님을 모시고 정진을 하게 되었는데, 특히 칠불암에서의‘공부하다 죽을 각오를 한 정진’은 지금까지도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38세(1951년) 이후부터는 문경군 농암면에 있는 원적사에 주로 머물렀다. 맹렬한 정진력과 깊은 지혜, 통쾌한 변재와 절도 있는 생활은 여러 수좌들의 귀감이 되었다. 그런 까닭에 주변에는 늘 스님의 도를 흠모하는 수좌들이 함께했다. 낮에는 대중들과 함께 정진하고, 밤이 되면 혼자 산으로 올라가 새벽예불 시간이 되어서 야 내려왔다. 원적사에서의 정진도 칼날 같았다.

범어사, 동화사, 함창포교당, 태백산 홍제암, 각화사 동암, 상주 청계산 토굴, 나주 다보사, 백양사, 지리산 묘향대, 천축사 무문관, 통도사 극락암, 제주 천왕사, 김용사 금선대, 상주 갑장사 등지에서도 한결같은 모습을 볼 수 있었다.

57세(1970년)에 봉암사 조실祖室로 추대되었으나 사양하고 선덕禪德소임을 자청하여 원적사를 오갔다. 당시 봉암사 대중들이 선방 벽에 붙어 있는 용상방龍象芳에 스님의 법호를 조실 자리에 붙이면 스님은 떼어내고, 대중들이 붙이면 다시 떼어내곤 하였다.

62세(1975년)에는 제10대 조계종 총무원장을 맡아 어려운 종단사태를 수습하고 2개월 만에 사퇴하였다.

65세(1978년) 이후부터는 봉암사 조실로 머물면서, 헤이해진 승풍僧風을 바로 잡고 낙후된 가람을 새롭게 중창하였다. 한편 수행환경을 위해 전국에서는 유일하게 산문山門을 막아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였다. 봉암사는 오늘날‘모든 수좌들의 고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78세(1991년)에는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을 맡아 성철 스님을 종정으로 재추대하여 종단의 중심을 잡은 후에 미련 없이 산으로 돌아왔다.

80세(1993년)에는 제8대 조계종 종정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에 종정직과 함께 봉암사 조실까지 사임하시고, 거제도, 삼천포 ,팔공산 등지를 거쳐 태백산 자락에 토굴을 지어‘무위정사無爲精舍’라 이름하고 무위자적 하였다.

88세(2001년)에 봉암사 대중들의 간청에 의하여 8년 만에 봉암사 염화실로 돌아와 한거閑居하였다.

90세(2003년) 3월 29일 오전 7시 50분 무렵 봉암사 염화실에서 “한 말씀 남기시라”는 제자들의 거듭된 요청에 “그 노장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갔다고 해라”는 마지막 말씀 남기시고 열반하였다. 4월 3일 봉암사에서 다비가 행해졌으나 생전 스님의 요청에 따라 사리를 수습하지 않았다

[책속으로]
“자네가 지금까지 책이나 선생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만 지껄이지 말고 단 한마디라도 좋으니 어디 네 자신의 이야기를 해보라.”
나는 벙어리처럼 입이 굳어졌다. 노장은 조용하게 말을 했으나 나는 마치 방망이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이었다. 멍하게 앉아 있다가 도망치듯이 물러나왔다.
_ 42쪽, 제1장 한마디라도 네 자신의 이야기를 해보라

옛날에는 수좌들이 조실 스님의 가르침과 명령에 절대 복종하였다. 또한 조실은 부처님 법에 합당하게 지도하지 어긋나게 지도하는 법이 없었다. 그렇게 하여 선원은 일사불란한 질서가 섰다. 조실과 수좌가 다투는 것은 공부 때문이다. 자신은 공부가 다 됐다고 생각하는데도 조실 스님이 인정을 해주지 않으니 조실의 멱살을 잡아끌거나 하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그것은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_ 150쪽, 제2장 목숨을 걸고 길을 찾다

출가승이란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부처가 되고 원력을 세운 사람들이다. 누구의 상좌였다든가, 누구의 법제자라는 인연이 중요한 것이 아니므로 보다 대승적인 자세로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내게는 문중이라는 이름의 울타리가 없다. 누가 내게 문중을 물으면 ‘석가문중’이라 대답하고, 무슨 종이냐고 물으면 ‘석가종’이라 답해왔다. 나는 처음부터 문중이라는 잘못된 세력집단을 배격해왔고 지금도 그것이 한국 불교를 망하게 하는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자기 문중의 은사 스님이라도 잘못된 길을 가면 따르지 말아야 하고 남의 문중이라도 그것이 불법이면 따라야 한다.
_ 189쪽, 제3장 잃어버린 붓다

인간의‘운명’에는 누구의 허물도 제삼자의 간섭도 없다. 이런 사실을 바로 깨우쳐주는 것이 참선이다. 참선은 마음에 이는 불꽃을 스스로 끄는 진화 작업이다. 시비에 빠지면 미운 생각, 고운 생각이 뒤엉켜 구름같이 일어나지만 한 생각 돌이켜 참선을 하고 나면 그 모든 것이 다 부서진다.
_ 223쪽, 제4장 태어나기 전의 나는 무엇이었나

눈앞의 현전일념現前一念, 이것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그 길을 아는 것이 참선의 목적이다. 세상 사람들은 고통 속에 잠긴 채 그것을 해결코자 하므로 아무리 발버둥 쳐도 고통의 바다에서 헤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참선을 하게 되면 하는 그 순간에 자기가 해야 할 일, 가야 할 길을 스스로 깨닫게 된다. 현전일념에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응시하면 마침내 마음이 통쾌해지고 안심입명의 자리를 얻게 된다. 그러므로 참선은 눈앞의 자기 인생을 응시하고 그 결과를 알아내는 작업이다. 그 방법이 일천칠백 공안이고, 팔만사천 법문이다.
_ 227쪽, 제4장 태어나기 전의 나는 무엇이었나

제 육신 하나 제대로 다루지 못하면서 무슨 공부를 하겠는가. 육신을 병원에 의지할 것 같으면 정신도 산문 밖의 그 누군가에게 의지해야지 선방에 앉아 있을 필요가 없다. 공부하다가 죽어도 좋다는 각오 없이 어중간하게 공부하면 시간만 허비할 뿐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정작 공부하다가 죽으면 그 또한 행복한 일 아니겠는가.
_ 239쪽, 제4장 태어나기 전의 나는 무엇이었나

누군들 자신의 인생을 대신해 줄 수 있겠는가. 누구도 자신의 인생을 어쩌지 못한다. 그러므로 인생을 살아가는 도리의 근원이 되는 생명의 실상을 깨우치고 알면 더욱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지 않겠는가.
_ 294쪽, 제5장 흔들리지 말고 살아라

인간이 중심이 되는 세계관, 인간이 최종적으로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세계관ㆍ우주관ㆍ역사관이 서양 문화의 황혼기에 태양처럼 새로 떠오르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것을 신의 섭리에 맡겨놓고 운명론적인 허무주의나 광신적인 내세 사상에 몸을 맡긴다면 그들이 원했던 대로 지구의 종말이 멀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 저질러놓은 모든 악과, 그 악의 결과로 도래할 지구와 우주의 황폐화를‘신의 진노’라는 이름으로 편리하게 책임 전가시키는 그런 종교에 인류의 미래를 맡겨서는 안 된다. 천 년하고도 수백 년이 넘는 연면한 전통을 지닌 한국 불교가 세상에 큰 기여를 하게 될 날이 눈앞에 와 있다고 생각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_ 353쪽, 제6장 미국 부처 인도 부처

예전에 상당하여 법문할 때는 격식을 갖추느라 감흥 없는 소리를 지껄였지. 옛 공안 중에서 한두 가지 빼내어 살을 붙이면 그만이었지. 지금은 불자들 여남은 명만 모이면 달려가 법문을 합니다. 상당법문보다 격식을 차리지 않고 하는 얘긴데도 말하는 내 가슴이 먹먹하게 울립니다. 전에는 그러지 않았거든. 부처님도 대중에게 설법하고 나서 가슴이 먹먹해질 때가 있었을 거요. 지금까지는 어느 신행단체가 주관하여 사람을 모으고 사람이 모이면 나를 청하여 법문을 듣는 형식인데 앞으로는 누가 부르지 않아도 고해에서 허우적거리는 중생을 보면 언제 어디서든 ?

[목차]
[이야기를 시작하며] 가르칠 수 없는 진리를 가르치고 나누는 것

제1장 한마디라도 네 자신의 이야기를 해보라
나는 누구인가
기상을 죽이지 마라
죽음과의 첫 만남
육신의 굶주림과 마음의 굶주림
부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오늘부터 너는 서악사의 머슴이다
김용사에서 출가와 수행
내 마음속의 갈증과 배고픔
일본 유학길
공부보다 생존이 절박했던 일본생활
나는 월급쟁이도 장사꾼도 아니었다
가난은 육체에 상처를 남기고
귀향
새로운 삶
다시얻은 생명 부활이다
청담스님, 성철스님 - 마지막 남은 비구들
청담스님 이야기

제2장 목숨을 걸고 길을 찾다
해방
불교청년운동
계룡산 토굴 속에서 여여한 마음을 보다
공부하다 죽을 각오로 시작한 칠불암 정진
계룡산에서6·25를 만나다
한국전쟁 당시의 원적사
원적사에 모인 수좌들
도도한 법맥이 서려있는 원적사
탁발과 동냥으로 원적사 살림을 꾸리다
벌목의 위기로부터 천년고찰을 지켜내다
봉암사재건을 위하여
양산박의 수좌들
수행자의 기상으로 가꾼 봉암사
산문출입을 막고 천년가람을 지키다
살아있는 봉암사의 선풍

제3장 잃어버린 붓다
한국 불교 근현대사의 중심, 비구
왜색불교의 척결과 정치권력의 결탁
정화불사의 아쉬움
경북불교를 위해 고생 좀 해 달라
문제는 사람이다
총무원장의 감투를 쓰고
조계사를 수행도량으로
10·27 법난은 부끄러운 일
성철스님을 종정으로 추대하다
법을 의지할지언정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
조계종 8대 종정으로 취임
불교개혁을 시작하다
폭력은 또다른 폭력을 낳을뿐
종정, 개혁의 대상이 되다
종정불신임과 종정사퇴
종정에서 자유인으로
자유인

제4장 태어나기 전의 나는 무엇이었나
마음을 쉬는 것이 참선이다
참선은 자유를 얻는 길
어머니 뱃속에 들기 이전에 그대의 생명은 어디 있었는가
출가수행자는 직업이 아니다
먼저 종단이 안정되고 올바른 지도력을 갖추어야
세속의 욕망은 산문밖에 벗어두고 오라
출가수행자에게 주어진 가장 큰 선물
영혼과 육체는 하나인가 둘인가
우리 생명의 끝은 어디인가
열반은 생명이 본래 공空임을 깨닫는 것
부처와 중생의 씨앗은 다르지 않다
일천 칠백 공안이 어찌 그것뿐이랴
팔만사천 법문이 모두 마음 깨치라는 한 가지 소리뿐
일본의 선禪
어떤 화두를 선택해 참구했는가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는 것이 화두
그대가 묻고 내가 대답하면 그것이 곧 부처

제5장 흔들리지 말고 살아라
신은 어떻게 태어나게 되었는가
신은 죽었다
종교란 무엇인가
인간중심의 근본진리
누가 인생을 대신해 줄 수 있겠는가
삶을 행복으로 꽃피울 수 있는 사람
인간, 사회, 자연의 균형을 잃은 물질문명
불확실성의 시대
잃어버린 마음의 근본을 찾아
본래 마음자리로 돌아가는 자기발견
참선, 꿈에서 깨어나는 방법을 말하다
몸이 생기기 전의 자기 면목
자기 삶의 주인이냐 도둑이냐
영원한 생명에 대한 인식
어떠한 경계에도 흔들리지 않는 법
너 자신을 의지하여 진리를 스승으로 삼으라

제6장 미국부처, 인도부처
종교 자유와 종교 이기주의
종교, 정치를 넘어서야 한다
아픈 상처 속에서 피어나는 미래 불교
승려의 세계는 투명해야 한다
불법은 펄펄 살아서 행동하며 흘러가는 것
계는 부처님 법을 담고 깨달음을 담는 그릇
수행자의 음식과 비룡스님의 벽곡
나는 음식을 가린 적이 없고 관심을 가진 적도 없다
이 밥을 받는 것은 도업을 성취하기 위함이다
비구는 얻어먹는 사람
미국부처여, 자유를 찾으라
미국부처, 인도부처
따뜻한 남쪽나라, 거제도

제7장 마지막 대화
무위의 선승, 서암
거제도의 만남
언제 길을 갈 생각인가
회향하는 법
쑥국
감옥같은 선방, 선방같은 감옥
음식에 대한 욕구를 끊고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
부처와 중생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민물에 사는 고래

[이야기를 닫으며] 큰스님을 그립니다 _ 이청

서암 홍근 대종사 행장

[저자소개]
저자 서암(西庵)스님은
한국 최고의 선승禪僧. 겉치레에 연연하지 않고 한평생 문중도 자기 절도 없이 수행자로만 살았다. 광복 이후 우리 사회가 매우 혼란스러울 때 당대 선지식이신 금오 스님을 모시고 지리산 칠불암에서 도반들과 더불어‘공부하다 죽어도 좋다’고 서약하고 용맹정진한 일화가 유명하다. 해인사, 망월사, 김용사 금선대 등에서 정진을 계속 하셨고 1952년 이후로는 청화산 원적사에서 다년간 정진하셨다. 1978년 이후 봉암사 조실로 추대되어 낙후된 가람을 전국의 납자 100여 명이 결제에 들 수 있도록 대작불사를 이끄는 한편, 일반 관광객의 출입을 금지시키고 엄격한 수행 기풍을 진작해 봉암선원을 조계종 특별종립선원으로 만들었다. 평생 선 수행을 바탕으로 법문하고 공부했던 스님은 사부대중이 이해하기 쉬운‘생활선의 법문’으로도 많이 알려져 있다. 선에 있어서도 생활속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 선이란 것은 어디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생활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손 움직이고 발 움직이고 울고 웃고 이웃 간에 대화하는 그 속에서 24시간 불교를 찾는 생활, 그것이 선”이라는 것이 스님의 가르침이었다. 스님은 평생을 몸이 허락하는 한 언제나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하고 시봉 또한 두지 않은 채 검소하고 소박하게 살다가셨다. 이렇게 일생을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몸으로 실천했던 큰스님의 모습은 지금까지도 수행자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1914년 경북 풍기에서 태어났으며 법명은 홍근鴻根, 법호는 서암西庵, 1993년 12월 대한불교조계종 제8대 종정으로 추대되어 재임 140일 만인 1994년 4월에 사임하고 종단을 떠났다. 2003년 3월 29일 세수90세, 법랍75세의 일기로 봉암사에서 입적하였고,“ 그 노장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갔다고 해라.”는 열반송을 남겼다.
저자 이청(李淸)(엮음)은 1945년 울산에서 태어났다.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되어 등단한 이후 지금까지 30여권의 저술을 남겼다. 작가 이청은 문학을 통하여 인간의 존재가 지닌 궁극적 가능성을 끝없이 모색해오 고 있으며 이러한 작가정신은 불교의 정신세계를 천착하게 하였다. 서암 스님과의 오랜 인연이 있어 큰스님 열반 이후 ‘서암 불교’를 제자리에 세워놓겠다는 열정을 가지고 글을 써왔다. 저서로는『사바행』, 『우리들의 초상』, 『부처님 동네』, 『바람처럼 흐르는 구름처럼』, 『은어낚시』, 『우리 옆에 왔던 부처』, 『화두의 향기』, 『이뭣고』, 『제3공화국 경제 비화』 ,『 7번국도를 걷다』, 『마지막 풍수』, 『대한민국 멸망』등 다수가 있다.

  • 배송정보
  • 배송 방법 : 택배
  • 배송 지역 : 전국지역
  • 배송 비용 : 4,000원
  • 배송 기간 : 2일 ~ 5일
  • 배송 안내 : ...◐ 빠른 배송이 되도록 항상 노력하겠습니다.
    ...◐ 주문제작 및 인쇄건은 배송기간이 각각 다르오니 전화문의 바랍니다.
    ...◐ 날마다 좋은 날 되세요.
  • REVIEW

    구매하신 상품의 후기를 남겨주세요.

    게시물이 없습니다

    상품문의하기모두 보기

    Q&A

    상품에 대해 궁금한 점을 문의해 주세요.

    게시물이 없습니다

    상품문의하기 모두 보기